• 최종편집 2024-04-26(금)
 
장호원의 진산(鎭山) 백족산(白足山)
 
이천시 장호원읍은 1941년 10월1일에 청미면에서 장호원읍으로 승격되었으니 73년이나 된 한국 최고참 읍이다. 수도권의 변방으로 각종규제에 묶여 발전하지 못하고 낙후된 읍 단위에 머물고 있음은 이 땅에 지운(地運)이 침체기를 맞고 있다 보면 될 것이다.
땅은 천기(天氣)의 작용인 시운(時運)에 따라 지운(地運)이 작용 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물길을 따라 발전하였던 수운(水運)교통이 자동차를 이용한 육운(陸運)교통으로 변화되며 내륙의 지운(地運)은 쇠태기를 맞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지(天地)의 운(運)은 항시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역사를 살펴보아도 경주 개성 한양으로 기운(氣運)이 옮겨 갔으며,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종로에서 남대문(명동) 동대문 강남 이렇게 지운(地運)이 이동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의 흐름은 60년 단위로 상원갑자(上元甲子) 중원갑자(中元甲子) 하원갑자(下元甲子)가 되어 180년이 한회전인데(180년이 되는 이때는 태양 지구 달 그리고 태양계 별들이 일직선으로 위치하게 되는 때임)이를 다시 상원갑자부터 20년 단위로 1운씩을 부여하여 1운에서 9운까지로 구분하는데 지금은 하원갑자 8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장호원은 중원갑자에 들어서며 쇠태기를 맞았는데, 아마도 9운이 되는 2024년부터는 용트림을 시작하여 상원갑자가 시작되는 2044년경에는 주목받는 위치에 서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천시 장호원의 진산(鎭山)은 진암리에 위치한 백족산(높이 402m)이다.
진산(鎭山)이란 풍수지리 용어로서 마을이나 촌락을 세찬 북풍이나 강바람의 직풍(直風)으로 부터 막아주기도 하고 마을의 지기(地氣)가 흩어지지 아니하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산으로 대부분의 도시나 부락은 진산에 의지하여 형성되어있다.
 
백족산(白足山)은 100개의 발을 가진 지네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정상 부근의 지네굴(굴바위)에서 백족산 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청미천이 산 남쪽을 휘감아서 북쪽으로 흐르면서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이천 장호원 율면 설성면과 음성 감곡면 생극면 그리고 안성의 죽산면 일원이 음죽현(陰竹縣)이라 하는 하나의 고을이었는데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며 음죽현을 폐하고 이천 음성 안성에 갈라서 붙이는 바람에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이 된 것이다. 옛 문헌인《동국여지승람》에는 산중에 석남사와 백족사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상의 지네굴에는 남이 장군의 탄생에 관한 전설이 얽혀 있다. 백족산 아래에 있던 절에서 수십 명의 승려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마지막엔 믿음 깊은 주지승만 남았는데, 주지승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읍내 글방 선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갔다. 그러자 글방 선생이 무명옷을 내어주며 이것을 승복 속에 입고 절대로 벗지 말라고 했다. 다음날 글방 선생이 산에 올라가 보니 지네굴 앞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무명 옷자락이 걸린 채 죽어 있었다. 지네는 무명옷의 진한 담배 진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때 백족산의 허리부분엔 오색구름이 감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기운이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개미실의 남씨 집으로 사라졌다. 그때 남씨 집안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유명한 남이 장군이라는 것이다.
당시 지금의 감곡면 영산리 일대에는 양촌 권근-권제-권람으로 이어지는 명문가가 자리하고 있었었다.  
남이장군은 1441년에 태종 이방원의 딸인 정선공주의 손자로 태어나 17세에 무과에 합격하고 당시의 세도가 권람(權籃)의 사위로 승승장구 하였고, 26세에는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을 격퇴하여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너무 일찍 출세를 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한때 동지였던 유자광, 그리고 장인 권람의 절친한 친구이던 한명회로 부터 역모의 모함을 받고 28세의 나이로 요절 하였는데 이는 남이장군 근본이 지네신의 환생으로 지네에 희생된 원혼들이 작용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2)백족산 금반지 명당 이야기
장호원의 주산(主山)인 백족산(白足山)은 사(砂)로 보면 천마사(天馬砂)에 해당하며 물형(物 形)으로 보면 갈마음수(葛馬飮水)형이다. 목마른 천마(天馬)가 청미천(淸渼川)에 코를 박고 물을 먹고 있는 형상으로 이곳엔 천마가 물을 다 마신 후에도 떠나가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말구유(먹이통)하나가 놓여있어 지형의 균형을 잡고 있다.
만일 원당리 벌판에 이것이 없다면 물을 충분히 먹은 말은 떠나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이 지역은 균형이 무너져 혼란이 올 수 있지만 이렇게 자연의 균형으로 물을 먹는 천마(天馬) 앞에 먹이통이 있어 말이 떠나지 못하도록 잡고 있는 형상이며 이곳 말 먹이통이 금가락지(金環形地)의 명당이다.
이곳을 살펴보면 원당리 마을일대가 평평한 들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독 이곳만 돌기(突起)하여 자그마한 동산이 되었고 동쪽으로 작은 공간이 터진 동그란 반지모양으로 내부가 1만여 평에 이르는 분지이며 배나무 사과나무 과수원과 광주이씨 문중묘역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모양으로 결혈(結穴)된 명당을 금환낙지(金環落地)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명당이라 부른다.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의 역신 김자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소개를 해야겠다.
김자점(金自點)의 아버지는 백족산 아래에 금환형지(金環形地)의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독을 들이다가 땅을 사들였다. 자신이 죽으면 이 자리에 장사하여 줄 것과, 반드시 시신(屍身)을 엎어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청개구리같이 평소자신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그리 하는 줄 알고 바르게 묻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혈 자리에서 보면 앞으로 청미천(淸渼川)물길이 시원하게 바라보이지만 그냥 흘러 나간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이다 고이는 물이 있어야 재물이 쌓이는 것이라서 김자점은 보(洑)를 막아 사시사철 푸른 물이 넘치게 하였으며, 이물을 이용하여 농사짓는 백성들로 부터 물세를 받아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단다.
김자점은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광해군 말년에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해군14년에 이귀(李貴)·최명길(崔嗚吉)·이괄(李适) 등과 반정(反正)을 하여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으며
이어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이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욕심이 더하여 왕이 되려하다가 역모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지라 김자점의 아버지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를 하게 되어 묘를 파내 관을 열고 보니 용이 되려고 어깨에는 작은
날개 지느러미가 자라고 있었단다.
용으로 환생하여 승천 할 수 있었으나 바로 뉘여 묻었기 때문에 날개가 다 자라지 못하고 바둥바둥하는 것을 칼로 쳐서 죽였다고 하는데, 반대로 엎어서 묻었다면 자범보(自點洑)의 깊은 물로 들어가 승천하였을 것이고 김자점은 반역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을 것이란 예기가 전해지고 있다.
 
**10 여년전 이곳의 풍수예기를 지방지에 기사화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이곳은 무분별하게 많은 묘지를 조성하여 명당의 기운이 모두 깨어지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조성된 묘지 의 절반정도는 수맥위에 용사되었으니, 적덕은 멀리하고 자리만 탐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아니하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장호원의 진산(鎭山) 백족산(白足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