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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균(權鈞. 1464-1526)
- 권균(權鈞. 1464-1526) 우의정 권균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권균은 연산군 때 승지로 있었는데 가자(加資)받아 정승에 이르렀다. 또 (중종)반정할 때는 집에 있었는데도 공훈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살육을 자행할 때는 여러모로 주선하여 살린 사람이 많았었기 때문에 중히 여김을 받았다. 기묘년에 신진 선비들이 법과 제도를 번거롭게 고칠 때는 이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았다.1) 또 처음 정승이 될 적에도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재능과 도량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일에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시 남곤과 심정 등이 바야흐로 일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일을 의논할 적에는 조금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승으로 있으면서 일의 골격을 보존하기에 힘썼고 손님 접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늘그막에 성품이 사나운 후처를 만나 따로 방 하나를 정하여 혼자 거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이라곤 어린 계집종 하나뿐인 가운데 숨을 거두었으므로 친지와 이웃들이 슬퍼하고 딱해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1년9월16일> 권균은 1486년(성종 17) 생원·진사가 되고, 14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충익부도사(忠翊府都事)를 지내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연산군 때에 장령·사간·도승지를 역임하며 연산군을 잘 보필하였다 하여 금대(金帶)를 하사받는 등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4등에 녹공되고,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그 뒤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1508년(중종 3) 형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신진 사림의 진출과 함께 훈구파(勳舊派)로 지목되어, 연산군 때 아부, 순종하며 벼슬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에도 계속된 탄핵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만류로 예조판서에 체직되었다. 15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사림파가 주동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로 공신호가 삭제되었다.기묘사화로 다시 관직에 진출하여 좌찬성·이조판서·영경연사(領經筵事) 등을 거쳐 1523년(중종 19) 우의정을 역임하고,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엄격하고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권균대감은 간질을 앓고 있어서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지만 반려 되었다 한다. 사람이 똑똑하고 자기 처신을 바르게 하여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왕래도 없었으며 말년에 후취로 들어온 부인의 패악이 심하여 사랑채에서 혼자 살다시피 하였다한다.하지만 그 포악하다는 연산군에게도 신임을 받았고, 중정반정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선무차원에서 공신으로 끼워 넣어 주었으며 중종에게도 엄청난 신임을 받았고, 당쟁이 심한시기에도 벼슬길을 순탄하게 이어간 것을 보면 분명코 조상의 묘가 좋은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권균묘역 답사를 했습니다. <묘역전경> 이곳은 제일 위쪽에 충성공의 증조부 권계(淃繼)의 묘가 위치하고 다음 단이 조부인 권미(權彌) 그 아래쪽으로 부모의 묘가 자리하였으며 다음이 권균대감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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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균(權鈞. 1464-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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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민치록의묘
- (前)호에 이어 명성황후가 어떠한 곳의 풍수적 기운을 받아 그 지위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원인을 찾아보려 민씨(閔氏) 가문의 선대 산소를 대부분 둘러보았지만 이 자리구나 하는 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주시 능현동에 자리한 황후의 7대조 민유중의 묘는 그리 좋은 혈(穴)자리라 하기 어렵다. 또한 가남읍 안금리 선영에는 6대조 민진후의 묘부터 부친인 민치록의 묘까지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6대조의 묏자리가 좋기는 하지만 발음을 입기는 너무 멀다는 느낌이고 5대조 민익수의 묘도 아주 작은 자리일 뿐이며, 그 이외는 눈에 뛰는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태어난 능현동의 생가자리에 서보면 도시화 되는 과정에 많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아미사(蛾眉砂) 안산(案山)이 예쁘게 받쳐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풍수고전에는 아미사 안산은 왕비를 낳는다 했기 때문이다. <민치록 대감의 묘>민치록의 묘는 1858년 사망당시 지금의 자리인 여주 금교리(지금의 가남읍 안금리)에 묘를 조성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일이 많이 발생하자 부모의 묘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에 강원도 원주로 이장을 하였다가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으며 또다시 광주 쌍령리로 옮겼다가 1894년 3월 20일 충남 보령에다 천장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민씨 문중에서는 2003년 다시 여주 선영의 원래자리로 천장을 하였다. <보령 주포면에 있을 때의 민치록 묘>명성황후는 자녀 4남 1녀를 낳았지만,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자신의 형제도 1남 4녀나 되었지만 자기하나밖에 성장하지 못하였고 자신도 5남매의 자식을 낳았으나 계속 죽어나가니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이였을까 하는 짐작이 가는바 있기도 하다. 시조부인 남연군의 명당 덕에 왕권을 차지한 내용은 조선 팔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친정가문이나 자신을 위해서 풍수의 힘을 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안금리 민진후 묘역>하지만 명당을 얻는 것은 적덕함과 시절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이거늘, 인연을 만나지 못해 술사들의 세치 혀에 놀아난 꼴이 되고만 것이다.그러나 최종천장지였던 충남 보령군 주포면 관산리는 상당히 눈여겨 볼만한 자리로서 예산 덕산의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와 형세적(形勢的)으로 많이도 닮은 곳이다. 하지만 천리행룡에 천하면당을 품었다 할지라도 재혈(哉穴)이 잘못되면 무용지물인 것이다.사람의 몸에 있는 침(針)자리 같이 정말로 땅의 기운이 응집된 그 혈(穴) 자리를 집어내어야 하는데 속사들의 눈에 큰 명혈이 그리 쉽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남연군묘를 점혈(點穴)한 풍수사(風水師) 정만인 같은 이인은 벌써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속사(俗士)들은 모양세에 취하여 혈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명당의 당판만 깨트리는 일을 했으니 발복(發福)은 고사하고 횡액(橫厄)만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보령땅으로 민치록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에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니 천하에 패절지가 되고 말았으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는 땅이 되었다.민씨 문중에서는 명성황후가 떠나 간지 108년만인 지난 2003년 여섯 번쩨로 민치록의 묘를 충남 보령에서 여주시 가남면 안금리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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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민치록의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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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아버지 민치록의 묘
- 명성황후와 아버지 민치록의 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고가신 명성황후(민자영1851~1895)와 다섯 번이나 이장하게 된 오천육장(五遷六葬)사연을 가진 고종의 국구(國舅)이며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1799~1858)의 묘를 살펴보겠습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의 5대 손으로, 아버지는 개성유수 기현이고 어머니는 정씨이다. 민치록은 민유중의 직계종손으로 장자(長子)승계되어 종산과 종답을 관리하였으며 여주 능현동 명성황후(민자영)가 태어난 집이 그의 소유였던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계(西人係)였고,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민치록이 가난하여 민유중의 묘지기를 했다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민치록 대감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해령부부인으로 추증된 해주 오씨(1788-1833)로 조선말기의 유명한 학자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딸이었는데 자녀를 두지 못하고 죽었다. 두 번째 부인이 한창부부인 한산이씨(1818-1874)로 증좌찬성 이규년(李圭年)의 딸이다.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어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이 때문에 명성황후가 계모의 손에 자랐다는 설이 등장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이 53세에 둔 늦둥이 딸이다. 8살에 아버지를 여윈 이후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에서 기거 하였다. <감고당>감고당은 종로구 안국동40번지 덕성여고 본관 옆에 있었는데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여주로 옮겨다 지은 것입니다.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기사환국(己巳換局)때 폐위되어 궁궐에서 나와 5년간 살던 집이며, 영조임금이 자신의 생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인현왕후가 고마워 “감고당” 이라는 옥호를 내리고 자주 들렀던 바로 그 집이다. 당시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토지가 있는 향리가 있고 조정에 일을 보기위한 한양의 집이 있었다. 감고당은 6대조 민유중이 지은 집으로 종손인 민치록이 상속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종손이지만 종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것은 크나 큰 문제가 되는 것이며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으로 왕이 된 것이나 가까운 친척하나 없었던 민자영이 세자비로 간택된 것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바가 있다. 안동권문에서 세도정치를 하기위해 강화섬에서 무지렁이로 살던 원범을 왕족이라는 이유로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것이나, 흥선군 대원이 대감은 안동김문의 세도정치에 눌려 지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 고심하다 명문가이기는 하지만 가까운 친인척이 아무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민자영을 세자비로 간택한 것이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번 본 책이나 사람을 잊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내는 솜씨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딸에게 아버지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방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탄강구리비가 서있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민씨 부인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 부인은 바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였다. 부대부인 민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의 누나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둘째아들인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명성황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외척들의 내정 간섭이 심하고 비리 또한 근절되지 못했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아무런 외척 세력이 없던 민씨를 고종3년(1866)에 고종의 왕비로 내정해서 간택한다. 몰락하긴 했으나 그녀의 친가 역시 인현왕후의 직계후손이라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민씨의 나이는 16세, 고종은 1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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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아버지 민치록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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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능현동 풍천임씨 묘역
- <前호에 이어> 사홍은 종친 서원군의 손자사위인 현석규를 탄핵하다 성종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며 복수의 칼을 겨누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였다. 3<임원준 묘역>임사홍은 이러한 기회를 잡은 것은 자신이 부친의 못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엄청난 치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곳묘역에서 가장 눈에 뛰는 것이 호석이다. 원나라 복장을 한 호석은 우람하기 그지없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당시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하고 우리나라는 신하국(臣下國)이라 하는 사대사상이 팽배하든 시절에 자신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우월한 가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집안은 대대로 중국어에 능통하였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이 자리로 인하여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욕심을 자재하지 못하여 화를 불러들이는 행위들을 펼쳐나간 것이었다.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임원준 묘의 기단 아래로 흙이 빠져나가 구멍이 생기니 석회를 버무려 땜질했지만 이 역시 부식되고 무덤(구멍)안으로 짐승들이 더나든 흔적이 보인다.채홍사를 하며 권력을 마음껏 휘둘러보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갑자사화 2년 후 중종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역신이 되어 처형당하고 자신의 아비까지도 부관참시를 당하게 하였으니 불효막급이라. 하지만 이모든 것은 이 자리 땅의 기운이 작용했다 보아야 할 것이다. 4<임사홍의 묘>임사홍의 묘자리가 혈(穴)이라하는 지사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지각에 해당하는 허화일 뿐이다. 혈(穴)자리를 볼라치면 임견(任肩)선생의 묘 뒤쪽 15m지점쯤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보일 것이다. 왕조실록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한 역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산소는 벌초하여주는 후손하나도 없이 방치되는 모양을 보며, 아무리 인과응보라 하지만 풍수의 무서움에 몸을 사린다. *본내용은 풍수적 소견이오니 풍천임문에서는 널리 해량하여 주시기를 앙망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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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능현동 풍천임씨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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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능현동 풍천임씨 묘역
- 여주 능현동 풍천임씨 묘역 여주시 능현동 산25-5번지 일원에는 풍천임씨 세장지가 위치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어느 가문을 막론하고 부침이 없는 가문은 없었다. 하지만 풍천임씨 가문은 임사홍이란 인물로 인하여 조상이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받았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풍천임씨는 임온(任溫)을 시조로 하며 원나라에서 고려로 들어온 성씨라 한다.황해도의 옛 지명인 풍천(豊川)을 본관으로 하는 임씨(任氏)는, 6世 임주(任澍)까지 풍천땅에 살았었고, 아들 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三司判事) 임자송(任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 임자순(任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풍천임씨 임사홍의 가계도를 살펴보자.7세 임자송(중시조)8세 임경유9세 임군보(고려판밀직사사)10세 임거경(병마절도사) 11세 임견12세 임원준(좌찬성) 13세 임사홍(풍성군) <사우당 임원준 묘와 뒤로 정경부인 의령남씨 묘가 위치하여 있다>. 임사홍의 아버지인 사우당 임원준(1423~1500)은 세조2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예문관 직제학과 좌찬성까지 올랐다. 경사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저서[창진집]을 남기기도 했다. 임사홍은 좌리공신(佐理功臣)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자,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였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여 풍성군(豊城君)에 올랐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가 되게 했다. 첫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왕)의 딸인 현숙공주(顯肅公主)에게 장가들어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셋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여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모자로 알려진 임사홍은 두 아들과 함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처형을 당했고,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잠시간의 정치적 출세가 영원한 간신의 낙인으로 그의 부친과 조상들을 욕되게 하였다. 풍천임씨가 여흥 땅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말(1366)임원준의 증조부인 임군보 선생이 신돈의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귀양을 오게 된 것이 연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필자는 임군보 선생과 그의 아들인 임거경 선생의 유택을 찾지를 못하였지만 상당히 좋은 자리에 장(葬)하였을 것이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그 아랫대인 임견이나 임원준 임사홍의 발적(發赤)을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를 풍수적으로 살펴보자.좋은 명당(明堂)자리는 고인(故人)이 세상을 살며 얼마나 적덕하였는가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 풍수의 이치라고 풍수고전(風水古典)은 적고 있다.적덕하지 못한 자가 적절하지 못한 자리에 들게 되면 갖가지 이유들이 생겨 다시 튕겨져나오기도 하고, 지관의 눈을 가려 엉뚱한 자리에 점혈(點穴)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곳은 천리 행룡한 용맥(龍脈)이 그 기력을 다하고 마지막 기운을 쏟아부어놓는 자리로서 일산일혈(一山一穴) 큰 자리 하나뿐인 곳이다. 땅에 있는 혈(穴)자리나 인체의 혈(穴)자리는 같은 역할을 한다. 인체의 특정부위에 병이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혈 자리에 정확하게 침을 꼽아야 병이 낫게 되는 것인데, 돌팔이를 잘못만나 혈은 버려두고 근처에 침을 마구 찔러대면 다른 부작용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임원준의 묘 우측 상단에 와혈(窩穴)형태의 조부모(임견)의 묘는 일대의 주혈인 진혈(眞穴) 가까이 있어서 남은 여기(餘氣)가 상당하다. 이묘를 조성하고 아들 원준은 좌찬성에 올랐으며 손자인 사홍은 이조판서, 증손자 광재는 예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숭재는 성종의 부마가되었으니 어찌 발복(發福)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임원준의 아버지인 임견과 부인 합장묘> 여주지역의 산맥을 우리 고유의 대동여지도에서 살펴보면 속리산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는 한남정맥이 양지근처에서 분맥(分脈)하여 마국산-노승산-설성산-연대산-대포산을 거쳐 황학산과 북성산을 일으켰다. 북성산은 영릉의 대명당(大明堂)을 품었고 여주시가지의 남측에 위치한 황학산은 천리행룡(千里行龍)한 일맥이 뻗어내려 남한강 대강수(大江水)를 만나 하나의 국세(局勢)를 형성하였다. 양택(陽宅)명당 한자리는 명성황후의 생가 터가 차지하였고, 천하대지인 음택(陰宅)자리는 임원준의 묘 부근에 있지만 점혈(點穴)을 잘못하여 진혈(眞穴)은 두어두고 사룡(死龍)의 무맥지(無脈地)에 자리를 골라 임씨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임사홍의 특기가 중국어와 풍수였다 하는데 자신의 부모자리 재혈(裁穴)한 모양을 보면 책풍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쟁과 사화로 벼슬길에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귀양길에 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시대 상황이기도 하였지만 1500년 임사홍의 아비인 임원준을 이 자리에 장(葬)하고 나서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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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전의 묘
- 여주 세종대왕의 묘지가 천장되며 영릉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되어야 했던 묘(墓)중에, 광주이씨인 이인손의 묘와 한산이씨 이계전의 묘에 대한 전설적 예기가 전해져 온다. 그 중심에 있는 이인손의 묘는 2013년 초에 소개 한바 있고 이번에는 한산이씨 한성부원군 이계전의 묘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릉의 자리는 원래 광주 이씨(廣州李氏)인 이인손(李仁孫)의 묘택 이라는 주장과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세조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이며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진 이계전(李季甸)의 묘택 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예종실록에는 예종 즉위 원년(1468년) 12월 27일 호조판서 노사신, 예조판서 임원준, 한성부윤 서거정 등이 여흥(여주)에 가서 이계전의 분묘 자리에 천장할 것을 정하자 임금이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등 좌의정과 육조참판 및 승지를 불러놓고 상지관(相地官)인 안효례(安孝禮)에게 물어 최종 결정을 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다. 어차피 왕릉이 들어서면서 그 일대의 십리 이내는 모두 파묘해야 하므로 그 자리다 아니다 하는 논쟁은 별 가치가 없는 일이고, 그 때 옮겨진 자리가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 산50번지 현재의 자리로 지금까지 유택이 잘 보존되고 있다. 여주군 점동면 소재지에서 원주 부론면으로 가는 84번 지방도를 따라 1km쯤 진행하면 사곡2리 마을이 나타난다. 좌측 마을 뒤 야산자락에 여러 기의 묘역이 보인다. 여주 이천의 산들은 야트막하다. 이는 남한강의 대강수가 가까워짐에 따라 속리산에서부터 시작된 천리행룡(千里行龍)이, 나아가는 길을 멈추기 위해 주춤거리는 것이며, 먼 거리 행룡하는 과정에서 박환(剝換)하여 험한 기운을 탈살(脫煞)하고 정제되고 유순한 기운을 갈무리 하였다 보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국토를 산맥위주로 제작한 고지도 “대동여지도”에서 살펴보면 이 자리는 속리산에서 호서정맥을 형성하고 올라오던 산맥이 천년고찰 칠장사가 있는 칠장산에서 분맥(分脈)하여 “한남정맥”을 만들며 올라가다 용인 양지고개에서 “독조지맥”으로 갈려나와 마국산-노승산 -설성산-신통산을 지나며 일맥이 갈라져 문열공 묏자리의 현무(玄武)를 형성한다. 청미천의 강인한 대강수(大江水)의 살기를 점동면 부구리 뒷산이 막아주며 약간은 답답하지만 평범한 듯이 이 자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용케도 찾아서 재혈(裁穴)을 하였다. 여기는 경기도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계전(1404~1459)은 세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병보(屛甫),호는 존양재(存養齋)이다. 목은(牧隱)이색(李穡)의 손자이자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의 아들이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外孫)이기도하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가 되고, 1436년(세종18)에 왕명으로 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참여하여 정인지(鄭麟趾) 등과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공의 묘는, 대리석비신 앞면에 “유명조선(有明朝鮮) 수충위사협찬정난좌익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佐翼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 증시(贈諡) 문열(文烈) 이공계전지묘(李公季甸之墓)”라 쓰고 뒷면에 음기를 새겼으나 마모가 심한 상태다. 이계전 묘 아래에 그의 처(妻)인 군부인(郡夫人) 진씨(秦氏)와 상하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 7세손 전라우도병마수군절도사(全羅右道兵馬水軍節度使) 이찬(李)의 묘가 위치한다. 좌향(坐向)을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취하였는데 곤신(坤申)득수(得水)에 손사파(巽巳破)로서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사국수법(四局水法)과 사국용법(四局龍法)을 취하여 수국의 “녹존유개패금어(祿存流蓋佩金魚)”로 최대 길국(吉局)을 취하였다. 그리도 좋다는 명당자리를 세종에게 내어주고 천장하는 과정에서 진혈(鎭穴)은 모두 놓치고 맥(脈)만 태운 정도라서 많이 아쉽다. 이 자리의 수혈(首穴)은 산자락에 숨겨져 있고, 7세손 이찬의 묘 일부와 아래쪽은 지하수맥의 영향으로 습(濕)이 많아 자리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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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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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의 진산(鎭山) 백족산(白足山)
- 장호원의 진산(鎭山) 백족산(白足山) 이천시 장호원읍은 1941년 10월1일에 청미면에서 장호원읍으로 승격되었으니 73년이나 된 한국 최고참 읍이다. 수도권의 변방으로 각종규제에 묶여 발전하지 못하고 낙후된 읍 단위에 머물고 있음은 이 땅에 지운(地運)이 침체기를 맞고 있다 보면 될 것이다. 땅은 천기(天氣)의 작용인 시운(時運)에 따라 지운(地運)이 작용 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물길을 따라 발전하였던 수운(水運)교통이 자동차를 이용한 육운(陸運)교통으로 변화되며 내륙의 지운(地運)은 쇠태기를 맞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지(天地)의 운(運)은 항시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역사를 살펴보아도 경주 개성 한양으로 기운(氣運)이 옮겨 갔으며,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종로에서 남대문(명동) 동대문 강남 이렇게 지운(地運)이 이동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의 흐름은 60년 단위로 상원갑자(上元甲子) 중원갑자(中元甲子) 하원갑자(下元甲子)가 되어 180년이 한회전인데(180년이 되는 이때는 태양 지구 달 그리고 태양계 별들이 일직선으로 위치하게 되는 때임)이를 다시 상원갑자부터 20년 단위로 1운씩을 부여하여 1운에서 9운까지로 구분하는데 지금은 하원갑자 8운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장호원은 중원갑자에 들어서며 쇠태기를 맞았는데, 아마도 9운이 되는 2024년부터는 용트림을 시작하여 상원갑자가 시작되는 2044년경에는 주목받는 위치에 서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천시 장호원의 진산(鎭山)은 진암리에 위치한 백족산(높이 402m)이다. 진산(鎭山)이란 풍수지리 용어로서 마을이나 촌락을 세찬 북풍이나 강바람의 직풍(直風)으로 부터 막아주기도 하고 마을의 지기(地氣)가 흩어지지 아니하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산으로 대부분의 도시나 부락은 진산에 의지하여 형성되어있다. 백족산(白足山)은 100개의 발을 가진 지네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정상 부근의 지네굴(굴바위)에서 백족산 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청미천이 산 남쪽을 휘감아서 북쪽으로 흐르면서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이천 장호원 율면 설성면과 음성 감곡면 생극면 그리고 안성의 죽산면 일원이 음죽현(陰竹縣)이라 하는 하나의 고을이었는데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며 음죽현을 폐하고 이천 음성 안성에 갈라서 붙이는 바람에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이 된 것이다. 옛 문헌인《동국여지승람》에는 산중에 석남사와 백족사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상의 지네굴에는 남이 장군의 탄생에 관한 전설이 얽혀 있다. 백족산 아래에 있던 절에서 수십 명의 승려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마지막엔 믿음 깊은 주지승만 남았는데, 주지승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읍내 글방 선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갔다. 그러자 글방 선생이 무명옷을 내어주며 이것을 승복 속에 입고 절대로 벗지 말라고 했다. 다음날 글방 선생이 산에 올라가 보니 지네굴 앞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무명 옷자락이 걸린 채 죽어 있었다. 지네는 무명옷의 진한 담배 진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때 백족산의 허리부분엔 오색구름이 감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기운이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개미실의 남씨 집으로 사라졌다. 그때 남씨 집안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유명한 남이 장군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지금의 감곡면 영산리 일대에는 양촌 권근-권제-권람으로 이어지는 명문가가 자리하고 있었었다. 남이장군은 1441년에 태종 이방원의 딸인 정선공주의 손자로 태어나 17세에 무과에 합격하고 당시의 세도가 권람(權籃)의 사위로 승승장구 하였고, 26세에는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을 격퇴하여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너무 일찍 출세를 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한때 동지였던 유자광, 그리고 장인 권람의 절친한 친구이던 한명회로 부터 역모의 모함을 받고 28세의 나이로 요절 하였는데 이는 남이장군 근본이 지네신의 환생으로 지네에 희생된 원혼들이 작용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2)백족산 금반지 명당 이야기장호원의 주산(主山)인 백족산(白足山)은 사(砂)로 보면 천마사(天馬砂)에 해당하며 물형(物 形)으로 보면 갈마음수(葛馬飮水)형이다. 목마른 천마(天馬)가 청미천(淸渼川)에 코를 박고 물을 먹고 있는 형상으로 이곳엔 천마가 물을 다 마신 후에도 떠나가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말구유(먹이통)하나가 놓여있어 지형의 균형을 잡고 있다. 만일 원당리 벌판에 이것이 없다면 물을 충분히 먹은 말은 떠나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이 지역은 균형이 무너져 혼란이 올 수 있지만 이렇게 자연의 균형으로 물을 먹는 천마(天馬) 앞에 먹이통이 있어 말이 떠나지 못하도록 잡고 있는 형상이며 이곳 말 먹이통이 금가락지(金環形地)의 명당이다. 이곳을 살펴보면 원당리 마을일대가 평평한 들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독 이곳만 돌기(突起)하여 자그마한 동산이 되었고 동쪽으로 작은 공간이 터진 동그란 반지모양으로 내부가 1만여 평에 이르는 분지이며 배나무 사과나무 과수원과 광주이씨 문중묘역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모양으로 결혈(結穴)된 명당을 금환낙지(金環落地)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명당이라 부른다.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의 역신 김자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소개를 해야겠다. 김자점(金自點)의 아버지는 백족산 아래에 금환형지(金環形地)의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독을 들이다가 땅을 사들였다. 자신이 죽으면 이 자리에 장사하여 줄 것과, 반드시 시신(屍身)을 엎어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청개구리같이 평소자신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그리 하는 줄 알고 바르게 묻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 혈 자리에서 보면 앞으로 청미천(淸渼川)물길이 시원하게 바라보이지만 그냥 흘러 나간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이다 고이는 물이 있어야 재물이 쌓이는 것이라서 김자점은 보(洑)를 막아 사시사철 푸른 물이 넘치게 하였으며, 이물을 이용하여 농사짓는 백성들로 부터 물세를 받아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단다. 김자점은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광해군 말년에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해군14년에 이귀(李貴)·최명길(崔嗚吉)·이괄(李适) 등과 반정(反正)을 하여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으며 이어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이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욕심이 더하여 왕이 되려하다가 역모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지라 김자점의 아버지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를 하게 되어 묘를 파내 관을 열고 보니 용이 되려고 어깨에는 작은 날개 지느러미가 자라고 있었단다. 용으로 환생하여 승천 할 수 있었으나 바로 뉘여 묻었기 때문에 날개가 다 자라지 못하고 바둥바둥하는 것을 칼로 쳐서 죽였다고 하는데, 반대로 엎어서 묻었다면 자범보(自點洑)의 깊은 물로 들어가 승천하였을 것이고 김자점은 반역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을 것이란 예기가 전해지고 있다. **10 여년전 이곳의 풍수예기를 지방지에 기사화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이곳은 무분별하게 많은 묘지를 조성하여 명당의 기운이 모두 깨어지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조성된 묘지 의 절반정도는 수맥위에 용사되었으니, 적덕은 멀리하고 자리만 탐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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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의 진산(鎭山) 백족산(白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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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4대 문장가 택당 이식
- 조선의4대 문장가 택당 이식 조선의4대 문장가 택당 이식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산9-1번지에는 조선 4대문장가중에 한분인 택당 이식선생의 선산과 제자들을 가르쳤던 택풍당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 문장가답게 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서 풍수의 발복(發福)이나 폐해(弊害)를 실증적으로 살펴보기 아주 좋은 자료이기에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택당의 조부와 부친의 묘가 천하명당이라 하는데, 필자가 살펴보기로는 부친의 자리는 소지소혈이며 조부의 묘는 그렇게 좋은 자리라 보기 어렵다. 택당 이식선생은 덕수이씨 집안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렇게 관료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는 아니었다.?조부가 돌아가시고 15년 후에 택당이 태어난다. 이는 택당이 조부의 기운을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내놓으라하는 문장가이며?벼슬이 판서에 올랐다는 것은, 조부를 최초에 장하였던 익산의 묘터가 대단히 좋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택당의 나이 35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3개월간이나 장사(葬事)를 미루며 선영자리를 구하는데,?당시의 명지관이라 하는 박상의 이의신 그리고 오세준과 두사충까지 접촉하며 자리를 보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예나 지금이나 언론이나 권력주변을 맴도는 그런 사람들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는 것이다. 결과적인 유적을 살펴보면 유명하다 하여 꼭 좋은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택당 이식(李植)선생은택당은 한성에서 찬성공 이안성(李安性)의 아들로 출생하였다.호는 택당(澤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10년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한 후 1613년 설서가 되었으나 그해 가을 부친이 별세하여 사직하고 부친묘소를 지평 백아곡에 모시었고 1615년 조부의 묘를 이장한 후 1616년부터 백아곡에 세거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1616년 복직하여 북평사가 되었고 이듬해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하여 1919년 택풍당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 예조참의 우참찬, 대제학, 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44자헌대부에 올라 이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였고 1647년 64세의 나이로 卒하였다. 택당의 향리는 여주군 대신면 무촌리라고 한다. 그의 조부인 이섭은 외가가 있는 전북 고부로 낙향하여 살다가 37세에 별세하여 그곳에 묻혔으며, 부친인 안성(安性)공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46세로 벼슬길에 나아가 찰방정도의 하급관리로 살았고 말년에는 고향인 여주 대신면 무촌리의 향리에 살았다. 택당의 父 이안성이 별세하며 유언하기를 자신을 여주 원통동 어머니 묘소(이식의 조모)곁에 임시로 葬事하였다가 추후에 좋은 자리를 얻게 되면 옮겨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택당은 “지금 시대의 상황이 어렵고 집안이 빈한한데다 자당까지 연로하시니,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보장할 수가 없다. 만약에 묘역을 얻는다면 구태여 임시로 매장을 하고 뒷날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葬事를 미뤄가며 3개월 간 땅을 찾은 끝에 이곳 지평 백아곡(당시의 지명)을 얻어 부친의 유택을 모셨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전라도 고부에 있는 조부의 묘와 여주에 있는 조모의 묘를 이장하여 합장으로 모시게 된다. 이때 일을 처리해가는 과정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어 공부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택당은 벼슬길에 나가며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맺었고, 특히 당시에 지사로 유명하였던 이의신 박상의 오세준 두사충 등 여러 지관을 대동하고 선산의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이 말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이의신광해군 때 교하천도설을 주장하며 국풍으로서 명성을 떨친 이의신은 “勢如蟠龍 案如玉帶 從容若處女 局法成也字 坐坎一穴最寄”이라 했는데 풀이하면 형세가 용이 서린 것 같고 안산은 옥대형이라 얌전히 앉아있는 처녀모습과 같다. 야자형국의 국세를 이루어 자좌 오향의 최대길지라 하였다. 2, 박상의 조선의 명풍(名風)으로 선조 때 동대문 밖의 동묘(관묘)를 점혈한 박상의는 야사에도 많이 등장하는 국풍이었다. 박상의는 이곳자리를 金?形(금비형)이라 했다. 3, 오세준이기풍수의 대가로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의 묘자리를 점혈 하였다.물은 旺方으로부터 흘러 내려오고 龍이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있어 眞氣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길지임이 틀림없다 하였다. 4, 두사충 임진왜란당시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들어온 명풍수 두사충은 작전의 실수로 죽음에 처한 것을 조선의 정탁대감이 구명을 하여 살려주었기에 조선에 살고 싶다며 귀화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그는 이곳의 형국이 한나라 소찬후(蕭?侯)의 선조 묘역과 흡사하다 라고 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조고비(祖考?-조부모)천장을 하려고 장지를 파니 그 혈 위에 옛 사람의 석곽(石槨)이 매장되어 있었다. 제작된 것이 그 당시와 같지 않고 석곽에 문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의 명사인 이의신(李懿信)은 혈 위를 바로 찍으면서 예전에 매장된 곳은 훼손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의 말대로 하면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하나의 봉분도 만들 수 없어, 그곳의 좌측 상면으로 자리를 옮겨 바로 산맥이 내려오는 중앙에 위치하게하고, 매장된 석곽은 섬돌 아래 우측에 있게 하였다. 두개의 광중을 파보니 토질이 딱딱하고 옥돌을 잘라 놓은 것 같으며 습기가 없고 오색찬란한 빛이 길지임이 틀림없어 묘를 썼다. 라고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택당 자신도 풍수서책을 읽어 상당한 풍수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유명한 지관들에게?감정을 의뢰하여?모두가 이 자리를?也자형 명당이나 금비녀혈 등 매우 좋은 곳이라 하는 바람에 결정을 하게 된다. 택당의 저서 택당집(澤堂集)에는 정읍 고부에 있던 조부묘를 이장하는 과정이 수록되어 있어 살펴보기로 합니다.《천장하여 묘를 합치는 것이야말로 선인(先人)의 뜻이었다. 내가 조고(祖考-할아버지)의 영구를 모시고 북쪽으로 향할 적에 매일 밤 꿈속에서 선부군(先府君)이(아버지를 뜻함) 영구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바로 옆에 계신 것과 같은 느낌을 갖곤 했다. 그 당시 죽산(竹山)땅에 있는 늙은 종에게 중로(中路)에서 양식을 운반하라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종도 꿈속에서 부군(府君)을 뵈었는데, 부군이 명령내리기를 이미 영구가 출발하였다. 나도 배행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기일을 어기지 않도록 식량을 운반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두 꿈이 맞아 떨어짐으로 일행이 감동하면서 감히 나태한 생각을 갖지 못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부의 자리는 소지소혈이며 부친의 자리는 맥도 없는 무맥지지(無脈之地)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 이곳에 선영을 정하여 장사하고 난후에?택당이 기록한 내용을 보자.《여러 차례에 걸쳐서 술사들이 두루 살펴보고는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행하고 난 뒤로 4~5년 동안 집안에 전염병과 화재가 발생하고 일찍 죽는?변고가 생겼다. 나 자신도 곤경을 치르고 나서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옛 무덤을 침범하여 짓누른 결과라고 말하기도하였다.지금 보건대 아우 材는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고 있고 출가한 자매 네 사람도 영락해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직 나만은 늘그막에 아들 셋을 얻었고 내외의 손자들도 두었으며, 또 비록 말? 할수 없이 낭패를 당해 전락(轉落)했다 하더라도 목숨만은 끈질기게 아직도 보전하고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선조의 혼령이 지금껏 변함없이 돌보아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처음에 산을 정할 적에는 그 방서를 좋아하고 그 술사를 좋아하면서 지극히 경도(傾倒)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택당은 10년간이나 백아곡 택풍당에서 야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가? 풍수의 폐해(弊害)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애당초 오막살이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가도 큰 불편함을 모르고 살 수 있지만 고대광실에 살던 사람이 오막살이집으로 이사를한다면 정말 견디기 어렵다.(100평 아파트 살던 사람이 15평 아파트로 옮겨 산다고 생각해보라 견딜 수 있겠는지) 요즘 가족묘지 만든다며 좋은 자리 잘 계시는 조상들 파다가 한자리 무맥지(無脈地)에 모셔놓고 큰 대업을 완성한 듯이 허세를 부리지만 몇 년도 가지 못해 집안이 쑥대밭 되는 일이 허다한데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런지...?조부와 부친의 유택을 짓고 엄청난 시련을 겪은 후 조금은 잠잠해진 4년 후에 장자인 면하가 태어나는데 병약하였다. 그래서 1647년 택당이 64세의 나이로 졸하고 다음해엔 장자인 면하가 나이 스물아홉에 요절한다.?그러나 이 집안에는 이것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것이다.택당이 겸혈명당(鉗穴明堂)에 들어갔고 면하는 이일대의 주혈이라 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물론 재혈이 조금씩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택당이 卒할 때 2남인 신하는 스물다섯이었고 3남 단하는 스물셋 이었다.?이들은 이때부터 관운이 열려 2남 신하는?정3품 예빈시정에 까지 올랐으며 3명의 아들을 두었다. 3남 단하는 좌의정에 올랐고 아들 둘을 두었다. 손이 귀한 집에서 자손이 번창 하였으며 벼슬한자가 속출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택당과 큰아들 면하의 묫자리 덕이라 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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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4대 문장가 택당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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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지를 차지한 해월 최시형
- 천하대지를 차지한 해월 최시형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138(향토유적 제8호)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이다. 경주 출신으로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며, 19세 때 결혼한 뒤 28세 때는 경주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서 집강(執綱)으로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기도 했었다. 1861년 6월 동학에 입문하여 최제우(崔濟愚)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도통을 승계 받음. 1880 강원 인제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全)』간행, 1881 충북 단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 1894년 1월 동학농민 운동으로 무력투쟁을 전개 1897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1)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7년 이천시 설성 수산리와 여주 강천 도전리 등지 에서 도피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며,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하였다. 1907년 사후 9년이 지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아니하고 일흔둘의 생애를 살았는데, 절반에 해당되는 40년 가까이를 떠돌이와 도피생활로 점철하였으니 그 인생행로가 참으로 고달픔의 연속으로 어느 유명 성직자보다도 진정한 구도자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칼럼리스트 조용원 교수가 해월의 도피 생활에 대하여 발표한 글이 있어서 옮겨본다. 해월은 무려 34년 동안 봇짐 하나로 이 동네 저 동네,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숨어 다니며 포교하고 동학을 이끌며 살았다. 36세부터 도피생활이 시작되어 72세에 원주 호저면 송골에서 관헌에게 체포될 때까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 가지고 인생을 살았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팔자이다. 해월이 36년 동안 도망 다니면서 숨었던 아지트는 전국에 대략 200군데이다. 전국에 산재한 이 아지트들을 10년 넘게 추적한 박맹수 교수에 의하면 이 아지트들의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앞으로 들어오는 길은 하나인데, 뒤로 나가는 길은 여러 군데인 장소를 골라 아지트를 삼았다는 점이다. 숨어 있으면서 누가 잡으러 오는가를 잘 살필 수 있으면서 여차하면 뒤로 도망가기에 적당한 지형이었다. 대개 언덕 위이거나 산 중턱에 있는 암자들이 많았다. 미륵산의 사자암, 마곡사 가섭암, 영월 적조암·직동, 영양 일월산 용화동, 단양 영춘면 노루목, 여주 전거론, 이천의 앵산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포된 원주 송골도 그러한 지형이었다는 것이다. 피신처마다 하룻밤 머물기도 하고, 2~3일도 있었고, 상황이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6개월도 머물렀다. 항상 휴대하던 보따리 안에는 스승의 유저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의 필사본 그리고 짚신이 여러 켤레 들어 있었다. 요즘같이 품질 좋은 등산화가 있었으면 짚신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들 피신처에서 해월은 가만히 있지 않고 꽃과 나무를 부지런히 심었다고 한다. 송골에서 체포되기 전날에도 숙소에서 새끼 꼬는 일을 하였다. 제자들이 일을 말리면 "하늘임이 쉬는 것을 보았느냐"가 대답이었다. 숨막히는 도피생활을 하면서 72세까지 살았으니 해월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해월의 묘는 원적산 천덕봉(天德峰, 630m)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자리 또한 해월이 몸을 숨겨 은신 하던 곳들과 지형이 비슷한 편이다. 산 아래서는 산소 있는 곳이 전혀 보이지 아니하고 산소에서는 먼 곳까지 내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사형집행 후 가매장된 시신을 교도 이종훈(李鍾勳, 1855~1931)등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매장하였다 전하여 진다. 이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산을 타고 이동하며 낮에는 산속에 숨어서 쉬고 밤에만 이동하여 이곳에 도착하기 까지 수일이 걸렸다는데, 그 고행(苦行)은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원적산은『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기 남부지역의 수많은 산중에서 광교산, 수리산, 무갑산과 더불어 4대 명산에 해당하는 산이 바로 원적산(圓寂山)이라 적고 있다. 원적(圓寂)이란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열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르므로 원적산은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끊고 해탈할 수 있는 산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천덕봉(天德峯)또한 하늘의 덕을 내려 받는 봉우리라는 뜻이니 범상치 아니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명이나 동네이름은 함부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선인(仙人)들이 미래를 예견하였거나 특징 등 뜻이 다양하다. 물이 넘어간다는 “무넘이 고개” 최근에 댐이 생겨 생활용수관이 고개를 타고 넘어가는 일이나 “비상리(飛上里” “비하리(飛下里)에 비행장이 생기는 등 21세기를 예견 하는 지명이 허다하다. (2)해월의 묘소가 있는 천덕봉 자락으로 가는 길은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작은 마을은 2006년 4월 5일 故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한 곳이기도 하며, 행정구역이 경기도라 하여도 1980년대 까지 곰이 나왔다 할 정도로 산골 오지다. 그래서 이곳에 천하 역적으로 몰렸던 해월 최시형이 은밀하게 묻힐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하늘은 이미 해월이 이곳에 묻힐 것은 예상하였는지, 첩첩산중 해발430미터나 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천하 명당의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는 자리다. 이는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천명(天命)을 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천혈(天穴)로서 아주 귀한 자리다. 혈(穴)자리는 모든 살기(煞氣)와 조잡한 악기(惡氣)를 털어내는 박환(剝換)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산의 높은 곳은 대부분 암석이나 토질이 거칠고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흙살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이치인데 아주 더물게는 산중에도 박환된 자리가 있으며 사격(砂格)을 갖춰 장풍(藏風)이 된다면 극귀지지의 천혈(天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청송심씨나 기계유씨, 그리고 정선전씨 시조묘나 황희정승의 조부 묘 등이 천혈(天穴)에 해당되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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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풍수이야기- 19(신륵사)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8호)은 나옹의 사리탑으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등이 있다.고려말 그 어려웠던 시기에 나옹의 제자 2백여 명이 시주를 해서 이사업을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생전에 얼마나 유명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조선시대 초기 숭유배불정책 영향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종찰(宗刹)이던 고달사는 절을 폐하고 사찰부지는 공신에게 하사하였으며 젊은 스님들은 병사로 징집하고 나이가 많거나 어린 동자승들은 절집에서 쫓겨나 우두산 정상부근에 토굴을파고 생활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신륵사 또한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었다. 그러나 세종의 영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지정하였고, 1472년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고 한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신륵사가 여강(麗江邊)의 강변사찰이지만 봉미산 끝자락이 소지개 고개에서 크게 과협(過峽)하고 천리행룡(千里行龍)의 박환(剝換)된 그 기운을 포근히 신륵사에 내려놓고 있다.그래서 신륵사는 산속의 절에서는 맛보기 힘든 광활하고 고요함이 함께하는 정취가 있다.여기는 기운이 두 개의 맥으로 들어와 하나는 대웅전 자리에 머물고 또 하나는 내청룡(內靑龍)자락을 따라 내려가며 3층 석탑자리에 정제(精製)된 기운이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신륵사 터는 아주 잘 정제된 작은 보국의 자리다. 무리하게 터를 확장하고 가람을 배치한다면 이 땅의 지기(地氣)는 반드시 흩어지게 되고 그 리 되면 천년고찰은 허울뿐인 모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추가로 가람의 배치가 필요하다면 신륵사 서측 일주문 밖으로 설치(設置)하는 게 좋을 것이다.현존하는 천년고찰자리의 풍수를 세세하게 어쩌구 저쩌구 논하는 자체가 진부하기에 두리 뭉실 뭉뚱거려 시륵사 풍수이야기를 종(終)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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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풍수이야기- 19(신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