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혹독했던 지난 삶이 홀대받는 외국인들의 아픔 속으로 뛰어들게해...”
“수단에는 ‘울지마 톤즈’이태석 신부, 한국엔 ‘막노동자’박종일 목사”
 



경기 광주 역동 8-10번지에 3층에 조선족 교회, 이 교회에서 5분 거리 역동 213-1번지 건물 2층에 외국인 이주민들(캄보디아, 미얀마, 조선족 등)을 위한 다문화 센터 사무실과  교회가 있고, 지하에는 미얀마인들을 위한 공동체가 있다. 조선족 40여명, 캄보디아인 40여명, 미얀마인 40여명이 주말이나 휴일에 모여 동족들을 만나 향수를 달래거나, 타국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을 상담하고 해결을 받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광주는 공장이 많아 외국인들이 매우 많다. 근로자들이 1만 5천여 명에 이르고 다문화 가정이 2천여 세대에 이른다. 언제부턴가 광주의 외국인근로자들 사이에서 박 목사를 ‘아빠’ 부인 정미영씨를 ‘엄마’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베푸는 도움이 못가진자에게 베푸는 선심차원이 아닌 친부모가 자식을 위해 자신들의 행복을 내려놓듯 박 목사 부부의 삶이 그러했기에 그들이 부르는 호칭이었다.


“내려놓은 것은 헛된 욕심일 뿐 우리부부는 성공한 인생”


실제로 필자가 보기에 박 목사 부부는 그들의 행복을 내려놓은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려운 외국인들의 형제가 되어주기 위한 인생
을 살기로 한 것이다. 박 목사는 부인이 힘들어하지 않느냐? 는 필자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자신은 물론 내 아내도 외국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미싱(재봉틀), 한글을 가르치는 일들을 즐긴다. 그러니 인생을 포기했다 라기 보다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가 포기한 것은 욕심이고 얻은 것은 행복이다”라고 표현했다.


박 목사는 3개 교회를 운영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사례비를 한 푼도 가져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양해야할 아내와 아들, 딸이 있는 가장이다. 그래서 그는 생활비를 벌기위해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근로자로 일을 한다. 막노동, 용접, 박스 만들기... 그의 부인은 외국인들에게 피아노를 지도하고, 미싱을 배워 지도하고, 한글을 가르치고 오갈 데 없는 외국인들 뒷바라지에 늘 바쁘다.


“중2부터 잡초 같은 삶, 낮, 막노동, 밤, 공부 검정고시 부산전체 1등“


실제로 박 목사는 화순에서 가난한 농사군의 아들로 자랐다.(6형제중 첫째) 중2시절 굶주림에 지친 그는 15세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판으로 뛰어들었다. 24세가 될 때까지 그는 생존을 위해 굶주림과 사투를 벌였다. 용접, 신발공장 등 각종 공장을 전전하며 잡초 같은 인생을 살던 그는 24세 때 중퇴의 학력으로는 사회에서 불편함이 너무 많은 것을 느껴 야간을 이용해 검정고시에 도전한다. 晝耕夜讀, 그는 낮에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놀랍게도 결과는 부산시 1위 합격이었다. 그가 공부한 검정고시학원은 유명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대입 검정고시도 패스했다. 공부에 자신이 있던 그는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그래야 국가에, 사회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때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그는, 지금까지 이 나라를 서울대 출신들이 이끌어왔는데 ‘왜 사회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대한민국을 망쳤다고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입학이 나라를 행복케 하는 길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랑 베푸는데 인색한 종교계에 분노 치밀어... 좁은 문으로 들어갈 터...”


그는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신학의 길을 택한다. 목사안수를 받고나서도 그는 남들이 하는 편한 목회가 아닌 가시밭길을 걷는다. 37세가 되도록 사례비도 주지 못하는 어려운 교회들만 골라 부교역자로 도왔다. 37세가 되어 서울 거여동에서 1년 정도 큰 교회 목회를 경험한 그는 다시(13년 전) 경기 광주에 종이포장 공장에서 근로자로 취업한다. 그 공장은 외국인들이 많았다. 늘 자신들을 돌봐주는 박 목사를 따르는 40여명의 외국인들의 모임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 조선족, 미얀마인, 캄보디아인들의 요청으로 공동체가 생겨났다. 모두가 박 목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교회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막노동을 나가는 목사”박 목사는 이들 공동체 외국인들을 돌보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되 도움을 받지 않는다.(물질적 도움보다 직업을 갖도록 도와주고, 사례비 등을 일체 받지 않고 자신이 노동을 해 가족을 부양해왔다.)
둘째 외국인들이 자국에 돌아가 잘 정착하고 자신의 고국발전에 기여도록 인도한다.
   (안경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1기생 5명을 선발 ‘참빛 안경원’에서 3개월 코스 교육이      수 중. 20명 단위로  새마을 교육을 이수토록 함.)
셋째 투쟁이 아닌 상호 이득이 되도록 중재한다.(쌍방이 모두 만족토록 하여 기업체들 쪽에서 먼저 박 목사를 부르는 일이 더 많아졌을 만큼 양쪽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원칙들은 박 목사 자신이 모진 삶의 현장을 체험한 경험의 토대위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박 목사의 원칙들은 외국인들이 성실히 일하여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토록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었다.     


박 목사는 지난해 3월 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이 돌보던 캄보디아 여성이 울면서 박목사를 찾아왔다. 얘긴즉, 춘천으로 시집온 자신의 여동생이 한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했노라고 호소했던 것이었다. 평소에도 늘 괴롭혀오던 남편이라 살인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조사결과 보험6건에(보상금액 12억) 가입해놓고 그중 1건 1억2천만 원을 타간 사실이 밝혀졌다.  한인 남편이 부인생전에 캄보디아에 가서 부인의 사망신고를 했던 사실이 양국 경찰의 공조수사로 드러났다. 부검에서 수면제를 먹은 사실이 드러났다.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박 목사는 캄보디아인들과 함께 경찰서에가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정황상 살인이 확실했으나 증거가 부족하였고 남편은 3명의 변호인을 고용 적극적인 방어를 하여 재판 결과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박 목사는 한숨을 쉰다..
박 목사와 춘천의 시민단체들은 캄보디아 유족들에게 한국인으로써 유감과 위로를 전하는 한편 2천만 원을 모금하여 사과와 함께 전달하였다.


약 7년여 전 한 조선족 동포가 각혈을 하다가 쓰러져 아주대 병원으로 실려 갔다. 검진결과 간경화였다. 치료비 1천만 원이 필요했으나 병원비가 없었다. 박 목사는 분당 샘물교회 장로인 샘 안양병원장에게 부탁 치료비를 500만 원으로 경감 받고 희년선교회(외국인들을 돕는 기독교 단체)에 호소 5백만 원의 치료비를 지원받아 그 환자를 완치 시켰다. 지난 해 12월 그 조선족 동포 자녀의 결혼 주례를 섰다. 회복된 조선족 동포의 부인은 이제 박 목사를 도와 조선족 공동체 식당의 모든 지휘, 봉사를 하는 수석 주방장(무급)이다.
박 목사는 이들을 돕느라 고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다. 늘 부정기적인 잡다한 일거리들(용접, 미싱 등,...)을 해왔다. 따라서 늘 생활비가 적자였다. 카드 돌려 막기는 기본이었다. 2011년 3월 그는 부산에 부모님이 물려준 집을 7천 5백만 원에 팔아 그동안 싸여왔던 빚을 청산하였다. 그러나 6월 현재 그는 다시 200여만 원의 빚을 안고 있다.


박목사는 이들의 안정된 일자리 마련에 노력한다. 그 일환으로 외국인들이 하청을 받아 납품할 수 있도록 기업체를 설득하는데 성공, 공동 작업장을 마련 중이다. 그의 부인은 미싱 기술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작업장에 미싱 기계 5대를 구비하였다. 기업에서 이들의 기술, 생산성을 인정하게 되면 일거리를 더 줄 것이라고 한다.


그를 돕고 있는 한국인 독지가 김명수(60)씨는 외국인들이 자국 식품매점을 염가에 구입할 수 있도록 식품매장을 열어 외국인들은 큰 혜택을 보고 있다. 김명수 씨는 박 목사의 선행에 감동받아 조선족 공동체 사무실 임대료 등을 위하여 기부하며 함께 외국인들을 돕고 있으며, 최진수(62)씨는 캄보디아인들이 주말에 식사를 하도록 돕고 있으며, 그의 동료들은 매월 1회 미용 봉사로 돕고 있다.


박종일 목사! 그는 우리주변에 보이는 그러한 흔한 ‘무늬만 종교인’이 아니다. 평생을 낮고 어려운 자들을 도우며 살아온 ‘울지마 톤즈’에 나오는 이태석 신부님에 버금가는 훌룡한 성직자이다. 다만 섬김의 대상이 아프리카 수단인들과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는 IMF 시절에 한국에 처음 온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가나인들이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김치 캔을 따 밥을 먹으며 “맛있어요” 할 때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아빠’이고 그의 아내는 그들의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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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외국인들의 ‘아빠, 엄마’ 다문화센터 ‘행복한 이웃’ 이사장 박종일, 정미영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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