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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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 관한 MOU를 체결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윤두현 서경한우 조합장.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윤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서경한우 윤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서경한우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 삼는 선순환 구조로 최고의 조합으로 발돋움시킬 터자체프로그램 중간 마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 저렴한 사료 조합원에게 공급5월 서경한우 더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 직영판매장 오픈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안녕하십니까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윤두현입니다.최근 본사와 가공공장 등이 화재로 전소되어 주위에서 우려해 주시고 아픔을 같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겠다는 신념하에 신속한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에 대해 간단히 소개 한다면 ?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농림축산식품부가 한우 전문 품목협동조합으로 인가하여 2012년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460여 조합원과 함께하는 중견급 조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50개월 이내 한우 암소를 유통하는 전문 조합으로서 자체 도축가공과 소매유통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수도권 한우의 가치를 높이는 견인마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서경한우는 수도권 축산업을 지켜내며 농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지역경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질 좋은 청정 한우 생산’을 목표로 조합원의 안정적인 소득향상과 바람직한 한우 먹거리 공급이라는 두 마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합원 임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질 좋은 한우 암소 고기를 저렴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가격의 현실화를 이룩하였고 이와 함께 품질 고급화와 다양한 메뉴를 개발 공급하여 직영판매식당을 이용하는 고객 누구나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 좋은 결실을 얻고 있습니다.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금용사업을 하고있지 않고 있으며, 소를 어떻게 잘 팔것인가?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에 집중하는 협동조합입니다3. 서울경기 한우협동조합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과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서경한우 자체프로그램으로 중간 마진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하여 저렴한 사료를 조합원에게 공급하고 있으며 초음파 및 거세 지원 등 다양한 사양지도 사업 등으로 조합원분들이 한우를 잘 키우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한우 지역 축산농가와의 동반성장을 목표로 매년 자체도축 비율을 높여왔으며, ‘돌보미사업장’ 활성화를 통해 ‘대리 축산영농 시스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서경한우는 조합원의 소득 증대를 핵심 이념으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왔습니다. 자체도축은 지난해 기준 833두이며, 올해는 약 50% 정도 늘어난 1,200두로 예상됩니다. 또 올해 이익은 5억 원 규모로 예상되는데요, 이중 2억 7천만 원은 배당금으로서 조합원의 몫입이다.”서경한우는 또 비대면 유통망 확충에도 힘 쏟고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온라인 판매 실적이 크게 향상되면서 온라인 마켓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4억 규모였던 매출액이 금년에는 무려 15억 규모로 성장했다.4.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윤 조합장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5.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사항을 밝힌다면 ?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6.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그동안 추진사항과 앞으로의 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천지역은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면이 많습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7. 서경한우 직영 판매 식당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 부담없는 가격으로 프리미엄급 한우암소를 즐길수 있는 수도권 명소로 자리잡는 것을 비젼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고객분들이 이용해주셔서 나름 많이 알려졌지만 더욱 노력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8. 서경한우 암소 브랜드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고객의 관점에서 브랜드가 발전되어 가야 합니다. 고객 관점에서 생산, 유통시스템이 구축되고 발빠르게 대응해야 브랜드가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에 서경한우의 ‘한우 숙성기술 활용 저지방 부위 부가가치 향상 시범사업’에 대한 식미 평가를 진행했다. “자체 건식숙성고에서 다양한 기간 숙성을 진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40일 건식숙성이 최상의 맛을 끌어낸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최상급 한우고기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2~3등급 저지방 한우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드라이에이징 기술을 활용한다면, 깊고 뛰어난 풍미를 더할 수 있기에 독자적인 상품성을 갖추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숙성(Aging) 이란 일정 기간 온도, 습도, 바람 등 숙성환경을 유지해 고기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는 기술로 숙성방법에 따라 건식과 습식으로 나뉩니다. 서경한우의 뛰어난 건식숙성기술에 40일의 기다림이 더해지면 2∼3등급의 저지방 한우고기도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풍미와 감칠맛이 향상됩니다. 우리 조합은 앞으로도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조건을 찾아 서경한우만의 기술을 만들어갈 것이며, 이를 통해 지역 한우농가의 소득 향상에도 기여하겠습니다.9. 어려운 경제속에서 직영 판매식당의 가격 할인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면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10. 주민들과 조합원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 ? 서경한우를 사랑해주시고 이용해주신 고객분들과 조합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더욱 발전되고 좋은 서비스로 함께하는 서경한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초대석
    • 초대석
    2023-04-26
  • 황순철 모가농협조합장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으로 발돋움시킬 터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조합원들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 최선의 노력 하는 조합장 될 터"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입니다.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또한,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황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모가농협 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모가농협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신 소득 작목 발굴 지원해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 넓혀가도록 계획 농협 주인인 조합원 섬기며 실익과 권익보호 농가소득 극대화시켜 나갈터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인사드립니다. 코로나19와 조류인플루엔자가 확산하여 발생되는 힘든 시기에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2021년 새해에는 건강하게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2, 모가농협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조합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인구 4,500여명 정도의 모가면에 위치한 우리 농협은 1,350여명의 조합원님들과 22곳의 영농회로 구성되어 있는 소규모의 조합이지만 조합원님과 임직원 지역주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내실 있는 강소 농협으로 활발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모든 성과와 그에 따른 결과는 우리 조합원님들과 주민들의 협조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던 것같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 모가농협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 및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4. 이천지역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 입니다. 5. 초선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 사항을 밝힌다면?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6. 모가농협 그동안 추진 사항과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면?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7, 현재 농민 조합원들로부터 산물 벼를 수매하고 있는데 수매가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소신을 밝혀 달라?해마다 벼 수매가는 생산 농가와 농협 간의 입장 차이가 생기고 갈등 발생의 원인이 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2020년에는 긴 장마와 일조량의 편차로 수확량이 전년 대비 감소한 상황에서 수매가격의 결정은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줄어든 생산량만큼 소득보존의 일환으로 수매가격을 인상하여 서로의 입장에 만족할 수 있는 수매가를 형성시켰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벼 수매가격 인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앞으로 임금님표 브랜드관리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대해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예전에는 농산물 관련 브랜드를 자산적 개념이 아닌 농산품 이름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고 전문인력과 관리조직의 미흡 등으로 사후관리가 안 되어 브랜드화 효과가 저조하였지만, 임금님표의 철저한 브랜드관리를 통하여 생산 농산물에 대한 공통적인 품질관리 체계와 소비자 욕구에 맞는 다양한 포장 규격 및 감각적인 포장 디자인 개발 등 브랜드의 상품화 사후관리와 공동 홍보방안 마련 등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 등의 수립으로 현재까지는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지역과 상품의 인지도 명성도 생산의 지역적 유리성 특정기술도입 등의 여건을 고려해 세분화된 유형별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목표시장을 점차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9, 현재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역 대표적인 축제 취소와 지역경제가 침체 되고 있는데 그 해결 방안과 정책 방향 그리고 조합원들을 위한 대책을 밝힌다면? 농촌경제연구원의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농업의 공익적 기능 식량안보 귀농 귀촌 증가 등 농업 농촌의 중요성이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이제까지의 농촌관광이 가족 친화나, 미식 여행을 주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향후에는 농촌만이 제공할 수 있는 힐링 건강치유 심신 휴양 자연환경 및 생태환경체험 가족 친화 미식 여행 등의 여러 목적으로 세분화 및 확대 될 것으로 예측이 되어 추후 코로나19 종식 이후 농촌관광 수요 확대 및 마이크로 투어리즘 등 관광형태 변화에 대비하여 지자체에 농촌관광정책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추가로 지역경제 침체로 역경을 겪으시는 우리 조합원님들을 위하여 다양한 자금지원방안의 모색, 인력중개를 통한 인건비 절감 부가소득을 조성하기 위하여 작물 종자 및 모종 공급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10, 주민들과 조합원들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코로나19로 심리적,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느라 고생이 많으신 우리 농업인과 이천 시민여러분께 당부 말씀 올립니다. 2020년은 지난날의 평온한 하루 한주 한 달 일 년이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결속된 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언론에서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연일 보도하는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크시겠지만 개인 방역수칙과 지자체의 안내에 성실히 따라주셔서 우리 이천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겠습니다. 저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은 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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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3
  • 친정집 가난 극복을 위해 논 닷 마지기와 맞바꾼 장님남편 선택 결혼
    2019/11/21 12:50 입력 모범시민 발굴 시상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고 정주영회장의봉사정신 효행상수상 본문은 본지 신선재 칼럼위원이 故 정주영 회장이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거나 효행 및 가족사랑을 실천하여 사회의 귀감이 된 인사와 단체를 발굴 표창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제정된 명망 있는 상으로서 1문1답 식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ㅡ편집자 주ㅡ 1.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수상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저는 이 상이 대통령표창 이상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큰상을 받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삶을 살아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사회가 이를 인정해 준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하고 눈물이 납니다.저를 추천해준 이천향교에 감사하고 저 때문에 가슴에 응어리 졌을 어머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2.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친정 사정에 간단한 소개를 해 주십시오.저는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에서 1943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3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해가며 생계를 꾸려갔기에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문장초등학교를 입학졸업을 하였고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어보고 포기한 체 사회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며 생활해 왔습니다.3. 결혼을 하게 된 동기나 각오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제 나이 20살 되던 어느 날 시골의 고모부로부터 “인근동네 부잣집에 장님아들이 있는데 그 집으로 시집을 오면 논 닷 마지기를 준 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고모부를 졸라 댔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차라리 내가 물에 빠져 죽겠다”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하여 장님에게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당시 저는 가난이 너무 싫었고 친정도 살리고 또한 불상한 사람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고 보란 듯이 잘 살아보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4.결혼생활과 함께 그동안 가정생활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신다면? 1964년 12월 시집을 와보니 시댁은 비교적 부농으로 약7,000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농사가 기계화가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짓는 농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로 오죽하면 촌부자 일부자라고 일이 많았습니다. 식구로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을 비롯하여 환갑 된 시부모님 그리고 팔순의 시조부님이 계셨는데 시조부는 노환으로 치매까지 있으셨습니다. 3년여를 조석을 따로 차려 드리는 등 병수발을 들었고 1968년 시조부님이 돌아가시자 시어머님이 병을 얻어 몸져누우셨습니다.시어머니는 10여년을 해소 천식을 앓다 1979년에 돌아가셨고 이어서 이번에는 시아버님이 몸져누우셨고 아버님 역시 치매와 노환으로 15년간을 고생하시다 1995년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3년 친정어머님이 몸져누우셨습니다.나로 인한 평생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불쌍한 어머님을 편하게 보내드리리라 마음을 먹고 남편을 설득해 친정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마지막 3년 전부터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고생을 하시다 2017년 돌아가셨습니다.5.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결혼 한지 14개월 만에 첫 아들을 낳고 10여년간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다행이 모두 정상아로 태어나 감사하나 “아버지가 장님인지라 다른 애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학교 가는 자녀들을 뒤 따라 가는가 하면 몰래 교실을 훔쳐보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을 수시로 찾아가기도 하고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내 집처럼 드나 들다보니 교장선생님께서 “부교사로 임명 해야겠다”며 1979년 어머니회장을 맡겨 그로부터 중학교까지 13년간 자모회 활동을 하였습니다.6. 바쁜 생활 속에서도 시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하던데요?1969년부터 10여년간 이천군 생활개선회장을 비롯해 79년부터는 새마을부녀회장 10여년을 맡으면서 농촌부엌과 화장실개량 꽃밭, 꽃길 가꾸기 등 농촌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절미운동과 부녀회 공동밭 가꾸기 등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고 여기서 발생한 기금으로 마을 어르신들께 수시로 (고유 명절이나 어버이날, 삼복 날 등) 식사를 대접하고 매년 효도관광을 시켜드리는 등 내 부모 모시듯 보살폈습니다.이밖에도 초, 중학교 어머니회장 13년, 자유총연맹 백사여성회장4년, 성균관 유도회 백사여성회장4년 등 40여년 간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했습니다.7. 농사가 많은데다 앞 못 보는 남편은 일을 못하고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네요?1964년 시집왔을 때만 해도 시부모님과 같이 손 모내기 손 벼 베기 등 재래식 농업으로 부모님을 도와가며 농사를 지었으나 농촌도 기계화가 되고 부모님이 일을 못하시게 되자 여자의 몸이지만 농기계 작동 법을 배워 77년부터는 손수 경운기로 두엄을 나르고, 논을 갈고, 써리고, 이앙기 탈곡기 등 기계화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가하면 담배, 고추 등 특용작물 재배, 양돈 등 안 해본 농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건강이 있었기에 가능 했던 것 같습니다.8. 힘든 삶을 살다 보면 초심을 잃고 후회도 했을 텐 데 이를 극복 할 수 있었던 비결은?저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가난에서 벗어나자! 불쌍한 남편을 살리자! 남에게 손가락 받지 말고 살자! 내가 택한 길 올바르게 남보란 듯이 살아보리라! 라는 신조로 살아 왔는데 끝까지 이를 지키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앞을 못 보는 장님의 특성이 남을 의심 하는 것이라 합니다.(특히 배우자) 어떤 때는 집안일을 팽개치고 사회활동을 위해 밖으로 나올 때는 마누라가 못마땅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고 격려해준 남편 덕에 감내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9. 그동안 생활을 해 오면서 감사와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첫째, 무엇보다도 내 옆에서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준 남편에게 감사하고요, 둘째,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자녀로 남들에게 따돌림 받고 자격지심이 있었을 텐 데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셋째, 평산 신씨의 며느리로, 집안으로, 이웃으로, 받아주고 위로 격려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계신 조읍1리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끝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며 타의 귀감이 되는 모범시민을 발굴해 시상해주는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저를 선정해 주신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류형복 기자가 만난사람 양강숙 사랑의요양원 원장
    2017/11/07 11:00 입력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 여가프로그램 개발 운영 사랑의요양원 원장 양강숙 사회복지사로써 요양원을 운영하게된 계기는?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와 삶의 질 높은 사랑의요양원 운영가을의 마지막 11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게 흘러 벌써 마지막 가을을 맞이하고 얼마 안 있으면 한해의 마지막까지 맞이하게 된다고 하니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저는 안산시 고잔동에서 사랑의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양강숙 입니다.요양원에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즐겁고 행복함을 느꼈기에 요양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현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 봉사활동내역을 소개를 한다면? 지난 8월 23일 사랑의 요양원과 밀리아나 경로당이 자매결연 협약 식을 가졌습니다.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갖게 된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지역사회에 계신 어르신들에게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자매결연을 추진 체결하여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앞으로 밀리아나 경로당에 쌀을 정기적으로 후원할 예정이며 이에 그치지 않고 경로당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약속했습니다.더욱이 노인의 날 지역 어르신들 모시고 식사 대접해 드리는 자리에 참여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앞으로도 꾸준히 할 생각이며 시간이 허락되면 생활이 어렵거나 독거노인 분들께 도시락 배달도 계속 참여할 생각입니다. 사랑의요양원의 조직과 구성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은 19인 시설로 현재 어르신 19분이 생활을 하고 계시며 시설 규모는 생활실 6개 프로그램 실 물리치료실을 완비 어르신들의 체력과 기능을 향상 유지시키는데 힘쓰고 있으며 종사자들은 시설장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8명 조리원 2명이 위생 신체활동 정서적인 지원을 하며 어르신들의 팔 다리가 되어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역 생활에 느낀 장, 단점과 원장의 역할에 대해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현재 우리나라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과 의료기술로 인하여 수명이 연장 되면서 노인인구는 급속히 증가되는 반면 젊은 세대들의 결혼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맞벌이 부부들이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자녀 출산에 대해 각종 양육비와 교육비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출산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 인구의 남녀노소 균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우리의 현실은 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제가 생활을 하고 있는 안산시 역시 예외가 아닌 노인 인구가 매우 많이 있는 가운데 도시락 배달을 하며 같은 건물과 인근에 누구는 지원을 받고 누군가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습니다. 이런 경우는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도시락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별적인 복지라 하여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더욱 지원이 필요한 분들이 먼저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몰라서 신청을 못하시는 분들도 많고 갑작스럽게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지원이 필요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노인뿐 아니라 소외계층 모두가 혜택을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설을 운영하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은 어르신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제공하고 생활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어르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능을 유지하고 발굴하여 향상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과정은 모두가 힘들지만 어르신이 점점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모두가 기뻐하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직책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의 운영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저희 사랑의 요양원은 무엇보다 불편한 노인 분들을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 되어 입소 노인 분들하고 임직원들이 일거수일투족 혼연일체가 되어 항상 즐거운 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어 높은 삶의 질을 만끽하시면서 편안한 생활과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립이념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소 노인 분들을 위한 치매예방을 위해 음악 미술 작업치료 웃음치료 등의 전문적인 치매예방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 하고 있습니다.또한 건강한 육체와 마음에서 건전한 생각을 갖고 생활을 할 수 있듯이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체조 수건체조 등 입소 노인 분들에 개별적으로 맞춤형 운동을 실시하는 신체기능강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풍요로운 여가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가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고 특히 사회적응훈련프로그램으로 예배 이, 미용 생신잔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을 느꼈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에 부부가 입소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치매 증상으로 우울증과 폭언이 심하셨습니다. 우울감이 심한 날은 식사도 거르고 힘없이 누워만 계셔서 항상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걱정도 많이 하시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저희는 할머니가 식사를 거르시면 죽을 드리고, 간식을 여러 번 제공하였고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가 가까운 시장에 모시고 가고 산책을 시켜 드리며 정서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셔서 폭언을 하는 날도 잦아들었고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아지셔서 부부가 함께 퇴소를 하셨습니다. 어르신들과 정이 많이 들었었지만 이때가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문제점과, 애로사항 있다면 소개를 해 달라? 요양보호사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직업입니다. 요양보호사들은 어르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우대하기 위해 힘쓰지만, 어르신이나 보호자들은 요양보호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은 아줌마라고 부르며 인격을 무시하고 사기를 격하시키며 자신들만이 만족 할 수 있는 시중과 서비스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인식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양보호사들도 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고 더 나아가 다른 어르신에게 피해가 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호간에 인격 존중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요양원에 대한 인식제고와 근본대책을 제시한다면?과거에 몇몇 안 좋은 요양기관들이 TV에 방영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양원이란 곳은 비인격적이며 문제와 비리가 많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관할 시·구청·보건복지부 국민보험공단에서 요양원에 대해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관에서는 지속적인 내부 교육을 통해 종사자의 전문성을 강화시키고 어르신들에게 최상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회의와 고민을 끊임없이 하며 실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많은 요양원이 투명성 있고 바른 운영을 하며 인식 제고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에 대한 색안경을 벗어주시고 열린 마음으로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흙과불 도공의 혼 삼위일체 도자기 예술품
    로원도예 권태영 작가의 투각 청자 도자기에 혼을 넣는다. 이천을 대표로 하는 원적산 줄기에 이어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원적로 133번길115에 위치한 로원도예(度希 권태영)가 조그마한 안내 간판만 우뚝 서 있는 가운데 예술감각이 숨쉬고 있는 로원도예 공방이 차지하고 있다. 도예공방에 들어서는 순간 벽에 걸려있는 낯익은 듯 한 외국인이 투각청자를 한국인에게 받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은 다름 아닌 미국 카터 대통령과 연세중앙교회 윤석전담임목사님이 나란히 서있고 그 아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청자 작품에 무언가의 글씨와 함께 자리매김 하고 있는 우화하고 청빈한 자태의 예술작품은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대통령에게 목사님이 전달한 로원도예 度希 권태영선생 작품이다.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과의 만남 도희(度希)권대영 선생은 약 10여년전에 한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서성이다 공방으로 들어서면서 당시 전시장에 전시중인 청자 한 점을 가르치면서 가격을 물어와 100만원이라고 말하자 10점이 필요하니 가격을 싸게 해 달라고 요구해 1점당 10만씩을 깍아주겠다고 하니까 제작기간을 6개월로 하고 빳빳한 수표 2장을 계약금으로 내놓고 돌아가 반신반의 끝에 6개월의 납품기간을 약속하고 제작 작업에 돌입하였다. ▣청자투각작품이 마침내 백악관과 청와대에 입성하다. 하지만 뒤이어 도자기에 들어갈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어 자칫 실수를 우려 곧바로 전사업체에 의뢰하여 영문도 모르고 작품 활동에 심혈을 다해 제작 납품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뒤늦게 알게된 사실은 미국 백악관에 카터 대통령외 유명인사들에게 자신의 제품이 선물로 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를 계기로 인연이 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청와대 이명박대통령 재임시절에 청자작품이 납품하였고 뒤 이에 박근혜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청자작품을 선물용으로 3점을 완성 2점을 전달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나머지 1점은 가보로 소장하고 있으며 항상 목사님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힌다. 박근혜대통령소장 도자기문구는 “선진들의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 배경 삼으시고 솔로몬의 큰 지혜로 국민통합이루시고 무궁화 꽃 활짝핀 통일나라이루소서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연세중앙교회 담임목사 윤석전” ▣흙이 좋고 먹고 살기위한 작품 활동이 도자기 예술로 승화 度希권대영선생은 일찍이 도자기의 마을인 신둔면 남정리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부터 늘 가깝게 할 수 있는 흙으로 인해 흙과 친해졌고 이어서 먹고 살기위해 흙을 이용한 도자기 작품에 심취하여 무작정 도자기업종에 젊음을 받치며 나름대로 자신만이 독특한 작품을 예술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연구 개발에 몰두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도자기는 오묘한 흙과 불 도공의 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비의 세계 도자기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도공의 피나는 노력과 예술성 감각과 정성을 다한 혼을 작품에 불어 넣을 때만이 흙과 불의 오묘한 조화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도자기의 작품이 탄생한다는 신념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상업욕심에 의해 대량생산으로 작품을 생각한다면 이는 예술품이 아닌 단지 상품의 역할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항상 도자기 작업을 하기위한 마음가짐 을 위해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해 순수한 자연의 섭리와 함께 최선을 다한 정성으로 내 자신이 예술품에 살아있는 혼을 불어 넣는다는 신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자기는 양질의 재료와 함께 좋은 형태를 만드는 성형이 중요합니다. 형태가 나와야 형태에 따라 무슨 문양과 음각 양각을 넣을 것인가 결정이 되며 아울러 청자의 멋은 색 형태 조각으로 비취색이라 하는 신비스러운 색에서 우러나는 품위와 형태의 오명한 각선미가튼 신비함과 오묘함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상감청자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작품의 고급화를 위해 이중투각 작품에 심취하여 짧게는 한 점에 1주일 길게는 2개월에서 3-4개월 걸리는 작품도 있고 좀 더 특색 있는 작품을 하려하면 재료를 제때 구하지 못해 6개월 1년을 걸리는 경우도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귀 뜸 한다. ▣비로소 도자기 도공으로 인정받다. 어린시절부터 흙을 좋아했고 더불어 생활을 하다보니 도자기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80년도에 토정 홍재표선생님께 물레수업을 사사받았고 형태와 선에 대해 국민대 김익영교수님 지도아래 배웠고 유약은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를 수료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1980년도 도예입문하여 1988년제10회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출품 1989년롯데백화점3회개인전 1990년동경전시회 1993년 전국민예품전시회출품 1995년10월 마침내 로원요를 설립하여 2015년2월26일 한국예술문화 전통도예투각명인으로 한국예총명인협회로 부터 인증을 받았다. 2008년12월25일부터 29일 일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전시 2009년 5월17일 제10회 클레이올림픽입선 9월23일부터28일 인사동서울미술관 전시전 12월 대한민국녹청자 현대도예 공모전입선 제14회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입선 2010년 제15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1년제3회목포 도자기전국공모전 특선 2012년제17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3년 4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서울경인미술관전시 2013년 제5회목포도자기전국대전 입선 2014년5월 제2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대상 제3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특별상2015년4월경기도기능경기대회은메달을 획득하였다./강민선기자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 수상 도예인 자긍심과 2013/05/13 18:06 입력도천 서광윤 '서광윤요'대표 활활 타오르는 진홍빛의 강렬한 불꽃! 그 엄청난 온도 속에서 오늘도 한국 전통자기의 탄생을 알리는 생명의 소리가 도공의 인고의 열정과 함께 고고한 자태로 익어가며 서광윤 도예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이처럼 그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은 흙에서 도예가의 예술혼과 함께 결을 따라 빚어져 자기로 재탄생 되며, 15세 소년 서광윤 그의 가슴도 뜨겁게 매료시켜 지금의 도예가로 탄생시켰다.1970년 25세의 나이로 지순택요에 입문하여 10여 년 간의 배움의 열정으로 도림서원 성형장으로 6년, 신정희요 성형장으로 10년간의 도예인 으로서 입지를 다지며 1996년 지금의 이천시 신둔면 마교리에 위치한 서광윤요를 설립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한국 전통 도자의 숭고한 맥을 이어오고 있다.한 덩이의 흙은 서 대표의 손길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고 성난 파도와 같이 한 획을 이루는가 하면 때로는 잔잔한 호수와 같이 고요히 흐르며, 그의 매만짐 속에 절제와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도자로 피어나 솔 향을 머금을 장작가마 속 불꽃을 통해 영롱한 백자로, 한 점 한 점 차별화된 무늬의 매력을 지닌 진사로, 소박해보이지만 정갈하고 절제미가 있는 분청으로 물레질부터 성형, 조각, 유약 바르기, 장작가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옛 전통방식으로 제작하고 잇다.특히 전통 장작가마 방식은 소나무 장작으로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가마에 불을 지펴 1300도가 넘는 고온으로 한국도자의 견고함과 장인의 고집으로 더욱 차별화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도자를 제작하는데 핵심적이다. 겉모습을 비슷하게 모방 할 수 있겠지만, 장인의 손에서 더해지는 변치 않는 도자의 가치는 시중에 유통되는 일부 도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을 이어가는 서 대표 만의 예술혼이 서려 있다.옛 전통을 이어감에 있어서 “요즘은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지만, 대중의 관심은 생활자기를 비롯한 호기심에 그치고 있지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람은 없다.” 라는 서 대표의 말속에 대중들은 며칠간 이뤄지는 축제의 퍼포먼스 처럼 여겨 소중한 우리 전통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한편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서 대표는 전통을 지키면서 도자의 가치를 알리고자 더욱 다양한 작품활동과 대중과의 소통으로 연구 노력하는 가운데 지난 29일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한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전통 도예발전 공로에 있어서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과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을 수상해 도예인으로서 자긍심과 위상을 드 높였다.또한, 일본 후쿠오카시 엘라홀 갤러리전과 장애인돕기 대구문화예술회관전, 장애우권익보호기금마련을 위한 도예장인전등 나눔을 통한 그의 행보는 도예발전에 기여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앞으로도 서 대표는 아내, 자녀와 함께 꾸려가는 서광윤요를 “힘든 와중에도 조용히 도움을 주는 터전으로, 실력과 자부심을 가진 전통도예의 뿌리깊은 계승자로, 나아가 세계인의 중심에 선 도예장인으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 전하며 “조금더 밝아질 도자미래는 애호가 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도자미래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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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농협조합장 이태용
    “농협 존재이유는 조합원 소득향상 권위향상, 권익보호에 있다”“농협28년의 전문 경영인 조합장이자 고향 지킴이”지난해 당기순이익27억4천만원 경영 성과 거두어이태용 이천농협조합장 대담:정봉영 발행인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이태용 이천농협 조합장의 대담을 통해 이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이태용이천농협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이천농협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저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원한 내고향이자 안식처인 이천에서 출생 이천초49회를 시작으로 이천중학교 이천제일고 동원대를 졸업하였고 사회의 첫걸음으로 1973년 농협에 투신하면서 28년간 농협일선을 두루 걸치면서 근무를 하였으며 퇴직과 더불어 2001년 이천농협 11대 조합장에 출마 하여 당선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2선과 3선 이천농협조합장직에 재임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기도농협운영협의회 대의원, 마트선도조합협의회 부회장, 주유소전국협의회 감사, 가지생산협의회이사, 이천쌀운영본부 이사, 농협문화복지재단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농정발전기여 농수산부장관상, 농산물 유통개선상, 농협발전기여 창립기념공로, 농협발전 기여 공적상, 자랑스런 경기농협 조합장, 재향군인 발전, 농촌사랑확산 1사1촌, 조합원 복지향상 농민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 현 이천농협조합장으로 재임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이천농협을 소개한다면? 이천농협은 1964년도에 설립인가를 받고 영업을 시작하여 꾸준한 성장을 하면서 명실공히 이천을 대표 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단위 농협으로 성장 하였다. 현재 3천5백여명의 조합원들과 창전동458-4 본점 종합청사와 하나로클럽을 비롯해 창전동지점 관고지점 설봉지점 부악지점 백사지점 갈산지점 6개지점망과 미곡종합처리장 주유소를 겸비한 농민을 위한 농협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3, 지난2010년 결산을 토대로 경영 성과를 소개한다면? 조합원들의 많은 성원과 전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한 결과 2010년 결산을 토대로 예수금 3,318억원, 대출금 3,101억원 실적을 도출하며 제반충당금 183%를 적립하면서 27억4천만원의 당기 순이익을 달성하여, 지난 한해 경영부문 우수상, 판매사업 500억 달성탑 수상, 상호금융 대출 3,000억을 달성하며 지역과 조합원의 상생발전에 온 힘 기울이고 있다. 4, 이천농협 조합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농협기능과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며 어떠한 조합원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말해 달라? 농협은 농민 조합원들을 위한 실익사업에 지원을 강화해 조합원들의 안정적 경영환경에 기여하기 위해 많은 노력 지원을 하여 경쟁력 있는 과학영농을 선도하며 농민을 위한 농협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다 해야만 한다. 우리 이천농협은 지원 사업 부문으로 전 조합원 영농자재지원, 친환경농업을 위한 숙원시설 지원, 육묘생산, 병충해 방제 등 고품질 쌀 생산과 일손부족 노동력 지원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함께 조합원 자녀 학자금 지원, 조합원 건강검진 실시, 전 조합원 농업인 안전공제 가입 등 복지사업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구제역 여파로 인한 소, 돼지고기 소비부진으로 상추 판매가격 동반하락으로 농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상인을 위한 직거래 장터를 개장,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지역주민과의 상생을 위한 문화센터시설 23개 과정을 운영, 연간 5800여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5,이천농협 3선조합장으로서 역점 사업계획을 밝혀 달라? 각지점과 사무소별 책임경영체제를 정착시키고 지역경제 밀착형 one stop 사업장을 만들계획과 함께 그동안 본점 마트가 각종 규제에 묶여 제 역할 수행을 하지 못했으나 작년 12월 3일자로 기존 제 2종 일반주거지역에서 준 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경, 금년도에는 본점 건물을 증축해 금융과 생활용품, 식자재용품, 영농자재 등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종합편익시설을 구축할 예정입니다. 특히 우리 농협의 불요불급한 고정자산을 매각 및 매입하도록 추진하고 있으며 협소한 주차장으로 고객민원이 많았던 갈산지점 이전도 계획 중에 있으며 지속적으로 고객만족 서비스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고마운 농협으로 거듭나 가장 가까운 이웃과 동반자가 되도록 더욱 노력할 것과 3천5백여명의 조합원들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면서 진정한 조합원들을 위한 이천농협을 건설할 계획이다. 6, 구제역 발생시 이천농협 전직원들과 함께 많은 노력과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는데 구체적으로 소개를 한다면? 무엇보다 이천시민들 모두가 축산농가들의 구제역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많은 헌신적 노력을 하였으나 결과는 초라 할 정도로 많은 피해가 발생되어 무엇 보다 가슴이 아프고 피해를 당한 축산 농가들이 하루 빨리 경영 정상화를 이뤄 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구제역이 발생되면서 이천농협은 전 직원이 조합원 밀집지역인 백사면을 중심으로 축사 방역 활동을 하였고 백사 초소를 1일7명씩 조를 구성하여 71일간 순번제로 구제역 확산 방지에 동참하였다. 7,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특별한 혜택 장려책이 있다면 밝혀 달라? 경로당62개에 난방유를 지속적 공급을 해 주고 있으며 지난 4월4일 본점 문화센터에서 조합원자녀 학자금으로 98명의 대학생에게 1백만원씩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며 퇴임 영농회장 부녀회장 감사패 전달하였으며 하나로개점6주년 경품 대 잔치를 실시 그동안 많은 성원과 협조를 하여 준 조합원과 마트이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을 나눠 줄 수 있는 기회를 부여 하였다. 8, 농협이 과거 이천쌀에 대한 선호도로 인하여 효자노릇을 하였는데 현실에서는 반대로 농협의 경영 악화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쌀에 대한 특별한 판매정책과 계획이 있다면 밝혀달라? 소비자와 생산 공급자와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와 믿음 신용이 우선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동안 이천쌀이라는 브랜드와 명성 인지도에 의존하여 구태의연하게 판매하는 과거 행태로 인해 사실상 효자 노릇을 하던 쌀이 경영 악화의 원인으로 둔갑 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본다 이는 원인과 이유를 하루빨리 파악하여 과감하게 탈피하여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기에 이천 농협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명성과 브랜드에 걸 맞는 품질 고급화가 급선무라는 점에 착안하여 미곡종합처리장의 첨단 시설화와 저장 시설등을 현대화하였으며 고품질의 상품 생산 공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9, 하나로신문 독자와 조합원 시민들에게 당부 및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농협의 존재이유는 농업인 조합원의 소득향상과 권위향상, 권익보호에 있습니다. 농협이 건실해야만 조합원과 지역사회에 더 많은 실익사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여건 속에 있지만 조합원님과 약속한 사항들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신뢰받는 자랑스런 농협, 경쟁력있는 농협을 만드는데 저희 임직원 일동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0,본인의 생활신조와 좌우명 소개 한다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생활신조로 삼고 항상 매사에 주워진 여건과 환경 속에 만족을 다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며 스스로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며 생활하면서 오로지 최선을 다한다는 신념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좌우명으로는 화합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
    • 초대석
    2011-06-02
  • ‘소외계층 어린이들의 대부’ ‘본가 양평해장국’ 박상섭(55), 최은실(50)부부
    “8남매의 맏이의 무게, 나의 과거 삶은 감당 못할 절망, 고통의 연속.”“자살하러 양평에 왔다가 재기, 소외된 아이들에게서 그늘을 지워주고파”댕기머리, 개량한복, 한고집할 것 같아 보이는 박 사장을 만났다. 오후 4시경 한가할 시간을 정해 양평 강상면 병산리 135번지에 있는 본가 양평해장국집에서 박 사장을 만났다.양평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의 대부라는 소문을 듣고 찾았지만 완고해 보이는 그의 인상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그래서 서두를 “양평 아동센터의 아이들을 취재해보니 너무도 천사 같은 아이들이라서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취재를 하려한다.”고 취재의도를 밝혔더니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식당 한쪽에 않아 인사를 나눠보니 그는 이천 부발 가좌리 출신이었다. 필자와 나이도 비슷했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선행을 한일은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던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발에서 가난한 집 8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말자고 했다.(부친에게 상처가 깊은 듯 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친은 8자녀를 키우느라 품팔이도 다니고 정말 고생을 하셨다. 연약한 엄마의 힘으로 8남매 부양은 무리였다.맏아들 박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린 그를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어떻게든 엄마를 도와 형제들이 굶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그 목표는 그의 엄마와 그에게는 장비 없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는 회고 했다.모친은 음식솜씨가 좋고, 부지런해서 동네 큰일 때면 불려 다녔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 줘야 여러 집에서 어머니를 부르게 되고, 자주 불려 다녀야 음식을 얻어 새끼들을 갖다 줄 수 있었기에 품삯이 없어도 어머니가 죽기 살기로 일을 하셨을 것” 이라고 했다. 일 끝나고 품삯 대신 남은 음식을 새끼들 같다주라고 싸주어 집에 와서 저녁에 음식을 싼 보자기를 풀어 놓으면 8형제는 제비새끼들처럼 달려들었다. 아침부터 주린 배를 저녁 한 끼로 채운 날 이었다. 그나마도 이런 날은 가족들에겐 호강하는 날이었다. 굶주린 동생들을 보다가 그는 악이 생겼다. 지나다 일하는 공사장이 보이면 생떼를 썼다. 일 시켜 달라고...모두 거절했다. 못 먹어 작고 깡마른 어린이를 쓸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당시 23만평 OB맥주공장을 짓느라고 측량 중이었다. 책임자에게 가서 울며 사정했다. 측은히 여긴 책임자가 말뚝 꽂는 일을 시켰다. 당시에 어른들 품삯이 4-500원 일때 300원을 주었다. 어린 박 씨는 일할기회를 준 책임자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 달 20일의 일할기회를 얻어 악착같이 했다. 한 달 일하면 보리쌀 한가마(4000원)를 사고도 남았다.당시 동산토건에서 공장을 지었다. 어린아이라고 잘릴까봐 등짐도 어른들만큼 져 날랐다.그러던 어느 날, (이 대목에서 그는 한참을 고개를 떨구었다.)어머니가 모내기 하던 집을 돕는 날이었다. 새참을 논가에서 먹는 시간이었다. 어린 동생들 손을 붙들고 새참 밥을 얻어먹으러 형제들이 나섰다가 그만 길을 건너다가 5세 된 어린동생이 그만 추월하던 차에 치어 사망한 것이었다.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강했다. 다른 집들은 자녀를 고아원 등에 보냈지만 어머니는 닭이 병아리를 품듯 한 자녀도 버리지 않고 다 기르셨다. 雪上加霜, 불행은 연이어 온다고 했던가? 셋째동생이 백혈병에 걸렸다. 병원을 한 번도 못가고 어머니가 지켜보는데서 죽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절규했다.”불쌍한 내 새끼! 못난 어미 만나 주사한방도 못 맞고 죽었구나!“ 라며 가슴을 치던 모습이 선했다. 16세 때 서울 전농동으로가 ‘서울 프레스’에서 시계 연마공으로 일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를 못 다닌 그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과정을 마쳤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자신이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걸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잡초에 비유했다. “세상엔 2등은 죽음과 다름없어요.1등만 생존 하는 곳 이죠.”하는 일마다 목숨을 걸고 일했건만 내 인생에 1등은 없었어요. 늘 짓밟히는 잡초 같은 인생이었죠. 지하방에 월세와 각종 빚이 200만원이나 밀려있었다. 보다 못한 후배가 내려오라 해서 15년 전에, 양평에 내려왔다. 후배를 보러왔다기보다는 양평에서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내려왔다. 자신이 겪은 혹독한 삶을 자식들이 대물림하여 참혹히 고생하는 것에 절망했다. 살면서 3차례나 자살을 생각했지만 그를 다시 살린 것 또한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이 떠오른 그는, 후배를 도와 길거리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 보조였다. 그러나 그 일조차 목숨을 걸고 열심히 했다. 그것조차 실패할까 두려웠었다. 늘 불안, 초조, 근심, 염려, 우울증...이 박 씨를 따라 다녔다. 홀로 있을 때가 제일 힘이 들었다.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울 때도 많았다. 자신이 불쌍하였고,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아내와 두 새끼가 불쌍하였다.그 지독한 외로움, 두려움을 잊으려고 그는 일이 없는 시간에 나무를 깎아 하회탈, 장승을 조각했다. 조각하는 동안은 두려움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그의 가게에는 당시 그가 조각했던 멋있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인생마다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는데, 어느 날 나에게 기회가 왔어요.”2년 여간, 내가 열심히 일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농협 조합장이셨던 이기태 조합장님께서 저를 불러 당시 비어있던 해장국집을 경영해보라고 하셨어요. 빈손이었던 나였지만 당신은 해낼 수 있다면서...“빈손인 제게 가게를 맡기신 거죠. 기적이 찾아온 겁니다.” 그는 다시 목숨을 걸었다. 혼자서 해장국집을 24시간 열었다. 잠은 1시간만 잤다. 어느 날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든 채로 않아서 잠이 들었다. 시작당시 91kg의 체중이 6개월쯤 지나자71kg으로 내려갔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죽고자 하니 살았다. 그의 인생이 녹아있기에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해장국 맛을 내기위해 하루에 세차레나 해장국을 솥 째 버린 적도 많았다. 다른 집은 가스로 불을 땔때 그는 장작을 땠다. 다른 집에서 10시간 끓이면 그는 20시간 이상을 고았다. 해장국을 끓일 때 비싼 사태도 넣고, 가마솥에 삶고....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 500여 손님중 반 이상이 양평사람들이었다. 어린이들도 고소하다며 해장국을 잘 먹었다.고진감래(苦盡甘來),성공이 찾아온 것이었다.그의 가게 앞엔 “가격을 올리지 않고 6000원만 받겠습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군인, 경찰은 5천원을 받는다. 추가 공기 밥은 무료다. 푸짐하고 구수한 해장국을 먹어보면 다른 집에서 7-8천원을 받는 수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외계층 아동들을 돕는 정왕훈 목사가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소외계층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많아서 옥석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년 뒤 정 목사가 다시 찾아왔다. 정 목사는 소외된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 점심, 저녁을 먹이고 공부를 지도해 그들을 성공시키고 싶어 했다. 박 씨는 아이들(양평, 용문 아동센터 학생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를 냉장고에 채우기 시작했다. 봉사자들까지 130여명의 인원이 먹는데 매월 돼지1마리를 공급했다. 쌀도 수시로 떨어질 때마다 채워줬다.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 5명(이화여대,여주대...)은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와신상담(臥薪嘗膽),그는 지금도 매일 한 끼 이상 찬밥을 먹는다. 집도 없다. 중고 옷, 신발을 산다. 가게 2평방에서 아내와 산다. 옛 고생을 기억하며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다. 아내(최은실,50)는 가끔 불만이다. 잘살게 된 지금 뭐가 달라진 게 있냐며...아파트로 이사 가자 고 도 한다. 그런 아내를 그는 다독인다. 한번은 여자들이 사고 싶어 한다는 가방을 사도록 허락을 해줬다. 고생을 함께 나눈 아내에게 경제권도 넘겨주었다. 큰아들(박두환,28)은 부모를 도와 가업을 승계하고 막내(박성환,24)는 음악을 하는 직장에 나간다.“자신이 통과했던 어둠의 터널 속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등대가 될 터..”. 그러던 어느 날 소외계층 아동들을 돕는 정왕훈 목사가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소외계층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많아서 옥석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년 뒤 정 목사가 다시 찾아왔다. 정 목사는 소외된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 점심, 저녁을 먹이고 공부를 지도해 그들을 성공시키고 싶어 했다. 밥을 굶는 노인들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감동받은 박 씨는 아이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를 냉장고에 채우기 시작했다. 봉사자들까지 100여명의 인원이 먹는데 매월 돼지1마리를 공급했다. 쌀도 수시로 떨어질 때마다 채워줬다.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 3명은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소외된 아이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싶어요. 정 목사님을 생각하면 무척 미안해요. 더 도왔어야 하는데...큰아들과 밥푸는 현장에 나갈 계획 이예요. 아동센터를 활성화 시키고 싶고, 장학제도도 확대하고 싶고, 아동센터 아이들을 월2회 정도 초대해 먹이고 싶고, 딸을 입양해 키우려고도 해요....그는 꿈이 많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확신할 수 있었다. 따뜻한 양평시민들이 그와 그의 업소를 더욱 아껴줄 것이라는 것을...
    • 초대석
    2011-06-02
  • ‘소외계층 어린이들의 대부’ ‘본가 양평해장국’ 박상섭(55), 최은실(50)부부
    “8남매의 맏이의 무게, 나의 과거 삶은 감당 못할 절망, 고통의 연속.”“자살하러 양평에 왔다가 재기, 소외된 아이들에게서 그늘을 지워주고파”댕기머리, 개량한복, 한고집할 것 같아 보이는 박 사장을 만났다. 오후 4시경 한가할 시간을 정해 양평 강상면 병산리 135번지에 있는 본가 양평해장국집에서 박 사장을 만났다.양평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의 대부라는 소문을 듣고 찾았지만 완고해 보이는 그의 인상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그래서 서두를 “양평 아동센터의 아이들을 취재해보니 너무도 천사 같은 아이들이라서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취재를 하려한다.”고 취재의도를 밝혔더니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식당 한쪽에 않아 인사를 나눠보니 그는 이천 부발 가좌리 출신이었다. 필자와 나이도 비슷했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선행을 한일은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던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발에서 가난한 집 8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말자고 했다.(부친에게 상처가 깊은 듯 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친은 8자녀를 키우느라 품팔이도 다니고 정말 고생을 하셨다. 연약한 엄마의 힘으로 8남매 부양은 무리였다.맏아들 박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린 그를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어떻게든 엄마를 도와 형제들이 굶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그 목표는 그의 엄마와 그에게는 장비 없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는 회고 했다.모친은 음식솜씨가 좋고, 부지런해서 동네 큰일 때면 불려 다녔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 줘야 여러 집에서 어머니를 부르게 되고, 자주 불려 다녀야 음식을 얻어 새끼들을 갖다 줄 수 있었기에 품삯이 없어도 어머니가 죽기 살기로 일을 하셨을 것” 이라고 했다. 일 끝나고 품삯 대신 남은 음식을 새끼들 같다주라고 싸주어 집에 와서 저녁에 음식을 싼 보자기를 풀어 놓으면 8형제는 제비새끼들처럼 달려들었다. 아침부터 주린 배를 저녁 한 끼로 채운 날 이었다. 그나마도 이런 날은 가족들에겐 호강하는 날이었다. 굶주린 동생들을 보다가 그는 악이 생겼다. 지나다 일하는 공사장이 보이면 생떼를 썼다. 일 시켜 달라고...모두 거절했다. 못 먹어 작고 깡마른 어린이를 쓸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당시 23만평 OB맥주공장을 짓느라고 측량 중이었다. 책임자에게 가서 울며 사정했다. 측은히 여긴 책임자가 말뚝 꽂는 일을 시켰다. 당시에 어른들 품삯이 4-500원 일때 300원을 주었다. 어린 박 씨는 일할기회를 준 책임자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 달 20일의 일할기회를 얻어 악착같이 했다. 한 달 일하면 보리쌀 한가마(4000원)를 사고도 남았다.당시 동산토건에서 공장을 지었다. 어린아이라고 잘릴까봐 등짐도 어른들만큼 져 날랐다.그러던 어느 날, (이 대목에서 그는 한참을 고개를 떨구었다.)어머니가 모내기 하던 집을 돕는 날이었다. 새참을 논가에서 먹는 시간이었다. 어린 동생들 손을 붙들고 새참 밥을 얻어먹으러 형제들이 나섰다가 그만 길을 건너다가 5세 된 어린동생이 그만 추월하던 차에 치어 사망한 것이었다.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강했다. 다른 집들은 자녀를 고아원 등에 보냈지만 어머니는 닭이 병아리를 품듯 한 자녀도 버리지 않고 다 기르셨다. 雪上加霜, 불행은 연이어 온다고 했던가? 셋째동생이 백혈병에 걸렸다. 병원을 한 번도 못가고 어머니가 지켜보는데서 죽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절규했다.”불쌍한 내 새끼! 못난 어미 만나 주사한방도 못 맞고 죽었구나!“ 라며 가슴을 치던 모습이 선했다. 16세 때 서울 전농동으로가 ‘서울 프레스’에서 시계 연마공으로 일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를 못 다닌 그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과정을 마쳤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자신이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걸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잡초에 비유했다. “세상엔 2등은 죽음과 다름없어요.1등만 생존 하는 곳 이죠.”하는 일마다 목숨을 걸고 일했건만 내 인생에 1등은 없었어요. 늘 짓밟히는 잡초 같은 인생이었죠. 지하방에 월세와 각종 빚이 200만원이나 밀려있었다. 보다 못한 후배가 내려오라 해서 15년 전에, 양평에 내려왔다. 후배를 보러왔다기보다는 양평에서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내려왔다. 자신이 겪은 혹독한 삶을 자식들이 대물림하여 참혹히 고생하는 것에 절망했다. 살면서 3차례나 자살을 생각했지만 그를 다시 살린 것 또한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이 떠오른 그는, 후배를 도와 길거리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 보조였다. 그러나 그 일조차 목숨을 걸고 열심히 했다. 그것조차 실패할까 두려웠었다. 늘 불안, 초조, 근심, 염려, 우울증...이 박 씨를 따라 다녔다. 홀로 있을 때가 제일 힘이 들었다.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울 때도 많았다. 자신이 불쌍하였고,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아내와 두 새끼가 불쌍하였다.그 지독한 외로움, 두려움을 잊으려고 그는 일이 없는 시간에 나무를 깎아 하회탈, 장승을 조각했다. 조각하는 동안은 두려움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그의 가게에는 당시 그가 조각했던 멋있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인생마다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는데, 어느 날 나에게 기회가 왔어요.”2년 여간, 내가 열심히 일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농협 조합장이셨던 이기태 조합장님께서 저를 불러 당시 비어있던 해장국집을 경영해보라고 하셨어요. 빈손이었던 나였지만 당신은 해낼 수 있다면서...“빈손인 제게 가게를 맡기신 거죠. 기적이 찾아온 겁니다.” 그는 다시 목숨을 걸었다. 혼자서 해장국집을 24시간 열었다. 잠은 1시간만 잤다. 어느 날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든 채로 않아서 잠이 들었다. 시작당시 91kg의 체중이 6개월쯤 지나자71kg으로 내려갔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죽고자 하니 살았다. 그의 인생이 녹아있기에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해장국 맛을 내기위해 하루에 세차레나 해장국을 솥 째 버린 적도 많았다. 다른 집은 가스로 불을 땔때 그는 장작을 땠다. 다른 집에서 10시간 끓이면 그는 20시간 이상을 고았다. 해장국을 끓일 때 비싼 사태도 넣고, 가마솥에 삶고....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 500여 손님중 반 이상이 양평사람들이었다. 어린이들도 고소하다며 해장국을 잘 먹었다.고진감래(苦盡甘來),성공이 찾아온 것이었다.그의 가게 앞엔 “가격을 올리지 않고 6000원만 받겠습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군인, 경찰은 5천원을 받는다. 추가 공기 밥은 무료다. 푸짐하고 구수한 해장국을 먹어보면 다른 집에서 7-8천원을 받는 수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외계층 아동들을 돕는 정왕훈 목사가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소외계층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많아서 옥석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년 뒤 정 목사가 다시 찾아왔다. 정 목사는 소외된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 점심, 저녁을 먹이고 공부를 지도해 그들을 성공시키고 싶어 했다. 박 씨는 아이들(양평, 용문 아동센터 학생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를 냉장고에 채우기 시작했다. 봉사자들까지 130여명의 인원이 먹는데 매월 돼지1마리를 공급했다. 쌀도 수시로 떨어질 때마다 채워줬다.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 5명(이화여대,여주대...)은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와신상담(臥薪嘗膽),그는 지금도 매일 한 끼 이상 찬밥을 먹는다. 집도 없다. 중고 옷, 신발을 산다. 가게 2평방에서 아내와 산다. 옛 고생을 기억하며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다. 아내(최은실,50)는 가끔 불만이다. 잘살게 된 지금 뭐가 달라진 게 있냐며...아파트로 이사 가자 고 도 한다. 그런 아내를 그는 다독인다. 한번은 여자들이 사고 싶어 한다는 가방을 사도록 허락을 해줬다. 고생을 함께 나눈 아내에게 경제권도 넘겨주었다. 큰아들(박두환,28)은 부모를 도와 가업을 승계하고 막내(박성환,24)는 음악을 하는 직장에 나간다.“자신이 통과했던 어둠의 터널 속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등대가 될 터..”. 그러던 어느 날 소외계층 아동들을 돕는 정왕훈 목사가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소외계층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많아서 옥석을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년 뒤 정 목사가 다시 찾아왔다. 정 목사는 소외된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 점심, 저녁을 먹이고 공부를 지도해 그들을 성공시키고 싶어 했다. 밥을 굶는 노인들에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감동받은 박 씨는 아이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돼지고기를 냉장고에 채우기 시작했다. 봉사자들까지 100여명의 인원이 먹는데 매월 돼지1마리를 공급했다. 쌀도 수시로 떨어질 때마다 채워줬다.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 3명은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소외된 아이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싶어요. 정 목사님을 생각하면 무척 미안해요. 더 도왔어야 하는데...큰아들과 밥푸는 현장에 나갈 계획 이예요. 아동센터를 활성화 시키고 싶고, 장학제도도 확대하고 싶고, 아동센터 아이들을 월2회 정도 초대해 먹이고 싶고, 딸을 입양해 키우려고도 해요....그는 꿈이 많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확신할 수 있었다. 따뜻한 양평시민들이 그와 그의 업소를 더욱 아껴줄 것이라는 것을...
    • 초대석
    2011-06-02
  •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박화자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당차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들의 집합소” 작은 원칙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 한다. 우리는 어머니이기에 당연한 ‘어머니의 사랑 전파’로 다할 터박화자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대담:정봉영 발행인 바쁘신 중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양평군 여성단체를 선봉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여성들과 회원들의 여권신장과 권익보호 아울러 봉사단체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양평군 여성단체 협의회 박화자 회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주민들에게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양평군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 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를 지역 주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로신문 발행인 및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많은 협조와 성원을 보내 주신 김선교 군수님을 비롯하여 공직자 기관 사회단체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당차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들의 집합소, 이자 순수한 봉사마음을 지닌 여성들로 구성된 순수민간 단체입니다. 2, 현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계신데 단체에 대한 소개와 역할 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관내 13개 여성단체의 연합체로서 ‘여성’이라는 퀄리티를 가지고 각 단체의 특징과 전문성을 통해 여성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연합으로 봉사 및 보조하는 기구로서 여권신장과 여성 권익보호와 사회 구성원으로서 진성한 봉사를 생활화하며 여성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3.그동안 양평군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봉사자로 널리 정평이 나있는데 대한 성공의 비결과 봉사활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시다면 밝혀 주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를 통해 생명을 이어받고 어머니를 통해 사랑을 먼저 배우며 어머니를 통해 자라난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관내 어둡고 삶이 흐린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치고자 한명 두 명의 여성들이 모여 단체를 이루고 또 그 힘을 배가시키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것이 우리 여성단체협의회다. ‘성공의 비결과 봉사의 계기’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머니이기에 당연한 ‘어머니의 사랑 전파’로 답을 하겠다. 4, 앞으로 양평군 여성단체 협의회의 운영방침과 계획에 대해 밝혀주십시오? 여성단체협의회는 여성권익보호와 여성들의 사회 참여, 여성 지도자 교육, 여성지위 향상 등의 내부적 ‘여성리더쉽교육’을 체험과 봉사를 통해 실시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저소득층을 향한 다양한 봉사 및 여성 계몽운동과 외국인여성들의 사회활동 참여 및 교육 등을 실시, 앞으로 더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면서 연구하여 우리 생활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 양평군민들과 늘 함께하는 여성단체를 만들겠다. 5,양평군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에 재임하면서 지역사회발전과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는데 양평군지역에서 활동을 하면서 느낀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문제점은? 양평은 천혜의 자연공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도시는 되지만 아직 몸이 편한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지금 보다 더 편리하고 가까운 의료서비스와 소방인력 확충을 통한 좀 더 많은 소방센터 가 설치돼야 한다고 본다. 다행이 양평군보건소에서 방문서비스 등의 다양한 의료 서비스와 양평소방서의 의용소방대원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작고 먼 곳까지 서비스 혜택이 주어지고는 있지만 좀 더 발전되고 보충되어야 하는 것은 양평군민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사람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6,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고 자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공적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업적과 공적에 대해선 참 부끄럽게 하는 단어다. 그래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먼저는 여성단체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양평에는 능력과 재능을 겸비한 멋진 여성들이 곳곳에 참 많음을 느꼈다. 그런 여성들의 재능을 발산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사회참여를 늘릴 계획이다. 또한 그 동안 소외돼왔던 외국인 이민 여성들의 참여를 늘려 그들이 사회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 것, 또한 요즘 들어 여성들의 화합이 부쩍 좋아 진점을 꼽고 싶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감투를 쓰기 위한 자리가 아닌 만큼 관내 많은 여성들의 참여와 그들과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이뤘다는 후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다. 7, 양평의 본격적인 전철시대가 도래되면서 많은 변화와 지역개발이 본격화 되고 있는데 앞으로 양평의 발전 방향과 지표를 제시한다면? 양평은 현재 과도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논과 밭이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수도권까지 1시간 안에 도달되는 전철이 생겨났다. 참 기분 좋은 현상이다. 늘 발전을 외치던 양평이 이제 정말 늦게나마 발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도 깊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규제는 주민들의 숨통을 쥐고 있다. 먼저는 각종 규제로부터의 해방이 이뤄져 인간에게 최소한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서비스가 활발해져야 하고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발전, 더불어 양평군이 잘 지키고 행해온 친환경 농업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누린다면 양평만큼 행복한 도시는 없을 것 같다. 8, 양평군 지역개발 환경 도시계획 발전에 문제점과 향후대책을 제시해 달라? 양평군은 천혜의 자원과 교통 요충지로서 그 어느 도시 보다 무한한 발전성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으나 단지 수도권 상류지역이라는 미명아래 철통같은 규제 일변도에 묶여 사실상 양평주민들은 지역개발 욕구에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전철 개통과 더불어 규제일변도의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주워진 여건을 이용한 산나물축제와 개군한우축제를 밑거름삼아 특산품을 개발하고 주민들의 소득증대 확충을 위한 정책과 지역실정에 꼭 맞춘 도시계획과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9,오랜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을 펼쳐온 양평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서 정치 입문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한 해답과 계획이 있다면 밝혀 달라? 정치입문설은 잠시 동안 주변의 권유로 제기되어 왔고 꿈을 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대한 꿈과 희망은 전혀 없다. 잘 자라준 자녀들의 어머니, 양평의 소외된 이웃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꿈이다. 10, 현재 사회활동과 단체 활동 봉사활동내역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먼저는 결혼이민여성사업 ▶사진 찍어 앨범 고향보내주기 ▶한국어말하기대회 ▶다도예절 등이 있으며 다음으로 독거노인 효도잔치를 펼쳤고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확대시키고자 여성주간행사, 대학교와 연결해 스피치교육실시, 신년인사회를 통한 여성 지도자들의 창조적인 정보를 교류해왔다. 또한 G-korea사업을 전개해 각 단체별로 가구리폼사업 및 건강걷기대회, EM생활용품 제작 보조 등을 실시했으며 자원평가대회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살려 열심히 봉사하는 여성자원봉사자에 대한 표창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자원 봉사자들의 사회참여를 늘리고 있다. 11, 하나로신문 독자와 양평군민들에게 당부 및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는 학교와 사회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정글의 법칙을 배워왔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사회는 점점 사랑이 줄어들고 나눔이 배고파졌으며 배려가 굶주려가고 있다. 결국 ‘더불어’, ‘함께’, ‘같이’,란 단어들이 서서히 도태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가 진단해봐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글의 법칙만 내세우기보단 감정시수를 높여 사랑과 나눔의 법칙을 모두 다함께 세워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고 약자가 강자가 됐을 때 또다시 약자를 돌봐주는 그런 사랑의 릴레이 말이다. 기관과 단체, 모두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면 아마 양평군은 정말 살맛나는 이상적인 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 ,본인의 생활신조와 좌우명 간단한 가족사항을 소개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신조가 하나 있다면 ‘원칙을 버리지 말자’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 그래도 원칙이란 틀을 깨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실수는 죄가 되어가고 죄는 양심을 잃어 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작은 원칙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때론 일부 사람들에겐 상처가 되기도 오해를 낳기도 한다. 그럴 땐 다시 초심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가족관계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과 곧 한 아이의 아빠가 될 막내아들과 딸과도 같은 예쁜 며느리가 있다. 또 곧 웨딩드레스를 입을 딸이 있는데 딸이 결혼하면 아들이 하나 더 생길 것 같다.
    • 초대석
    2011-05-26
  •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박화자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당차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들의 집합소” 작은 원칙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 한다. 우리는 어머니이기에 당연한 ‘어머니의 사랑 전파’로 다할 터박화자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대담:정봉영 발행인 바쁘신 중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양평군 여성단체를 선봉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여성들과 회원들의 여권신장과 권익보호 아울러 봉사단체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 양평군 여성단체 협의회 박화자 회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주민들에게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양평군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 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를 지역 주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로신문 발행인 및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많은 협조와 성원을 보내 주신 김선교 군수님을 비롯하여 공직자 기관 사회단체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당차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들의 집합소, 이자 순수한 봉사마음을 지닌 여성들로 구성된 순수민간 단체입니다. 2, 현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계신데 단체에 대한 소개와 역할 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관내 13개 여성단체의 연합체로서 ‘여성’이라는 퀄리티를 가지고 각 단체의 특징과 전문성을 통해 여성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연합으로 봉사 및 보조하는 기구로서 여권신장과 여성 권익보호와 사회 구성원으로서 진성한 봉사를 생활화하며 여성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3.그동안 양평군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봉사자로 널리 정평이 나있는데 대한 성공의 비결과 봉사활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시다면 밝혀 주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를 통해 생명을 이어받고 어머니를 통해 사랑을 먼저 배우며 어머니를 통해 자라난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관내 어둡고 삶이 흐린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치고자 한명 두 명의 여성들이 모여 단체를 이루고 또 그 힘을 배가시키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것이 우리 여성단체협의회다. ‘성공의 비결과 봉사의 계기’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머니이기에 당연한 ‘어머니의 사랑 전파’로 답을 하겠다. 4, 앞으로 양평군 여성단체 협의회의 운영방침과 계획에 대해 밝혀주십시오? 여성단체협의회는 여성권익보호와 여성들의 사회 참여, 여성 지도자 교육, 여성지위 향상 등의 내부적 ‘여성리더쉽교육’을 체험과 봉사를 통해 실시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저소득층을 향한 다양한 봉사 및 여성 계몽운동과 외국인여성들의 사회활동 참여 및 교육 등을 실시, 앞으로 더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면서 연구하여 우리 생활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 양평군민들과 늘 함께하는 여성단체를 만들겠다. 5,양평군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에 재임하면서 지역사회발전과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는데 양평군지역에서 활동을 하면서 느낀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문제점은? 양평은 천혜의 자연공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도시는 되지만 아직 몸이 편한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지금 보다 더 편리하고 가까운 의료서비스와 소방인력 확충을 통한 좀 더 많은 소방센터 가 설치돼야 한다고 본다. 다행이 양평군보건소에서 방문서비스 등의 다양한 의료 서비스와 양평소방서의 의용소방대원들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작고 먼 곳까지 서비스 혜택이 주어지고는 있지만 좀 더 발전되고 보충되어야 하는 것은 양평군민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사람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6,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고 자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공적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업적과 공적에 대해선 참 부끄럽게 하는 단어다. 그래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먼저는 여성단체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양평에는 능력과 재능을 겸비한 멋진 여성들이 곳곳에 참 많음을 느꼈다. 그런 여성들의 재능을 발산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사회참여를 늘릴 계획이다. 또한 그 동안 소외돼왔던 외국인 이민 여성들의 참여를 늘려 그들이 사회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 것, 또한 요즘 들어 여성들의 화합이 부쩍 좋아 진점을 꼽고 싶다. 양평군여성단체협의회는 감투를 쓰기 위한 자리가 아닌 만큼 관내 많은 여성들의 참여와 그들과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이뤘다는 후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다. 7, 양평의 본격적인 전철시대가 도래되면서 많은 변화와 지역개발이 본격화 되고 있는데 앞으로 양평의 발전 방향과 지표를 제시한다면? 양평은 현재 과도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논과 밭이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수도권까지 1시간 안에 도달되는 전철이 생겨났다. 참 기분 좋은 현상이다. 늘 발전을 외치던 양평이 이제 정말 늦게나마 발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도 깊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규제는 주민들의 숨통을 쥐고 있다. 먼저는 각종 규제로부터의 해방이 이뤄져 인간에게 최소한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서비스가 활발해져야 하고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발전, 더불어 양평군이 잘 지키고 행해온 친환경 농업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누린다면 양평만큼 행복한 도시는 없을 것 같다. 8, 양평군 지역개발 환경 도시계획 발전에 문제점과 향후대책을 제시해 달라? 양평군은 천혜의 자원과 교통 요충지로서 그 어느 도시 보다 무한한 발전성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으나 단지 수도권 상류지역이라는 미명아래 철통같은 규제 일변도에 묶여 사실상 양평주민들은 지역개발 욕구에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전철 개통과 더불어 규제일변도의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주워진 여건을 이용한 산나물축제와 개군한우축제를 밑거름삼아 특산품을 개발하고 주민들의 소득증대 확충을 위한 정책과 지역실정에 꼭 맞춘 도시계획과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9,오랜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을 펼쳐온 양평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서 정치 입문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한 해답과 계획이 있다면 밝혀 달라? 정치입문설은 잠시 동안 주변의 권유로 제기되어 왔고 꿈을 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대한 꿈과 희망은 전혀 없다. 잘 자라준 자녀들의 어머니, 양평의 소외된 이웃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꿈이다. 10, 현재 사회활동과 단체 활동 봉사활동내역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먼저는 결혼이민여성사업 ▶사진 찍어 앨범 고향보내주기 ▶한국어말하기대회 ▶다도예절 등이 있으며 다음으로 독거노인 효도잔치를 펼쳤고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확대시키고자 여성주간행사, 대학교와 연결해 스피치교육실시, 신년인사회를 통한 여성 지도자들의 창조적인 정보를 교류해왔다. 또한 G-korea사업을 전개해 각 단체별로 가구리폼사업 및 건강걷기대회, EM생활용품 제작 보조 등을 실시했으며 자원평가대회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살려 열심히 봉사하는 여성자원봉사자에 대한 표창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자원 봉사자들의 사회참여를 늘리고 있다. 11, 하나로신문 독자와 양평군민들에게 당부 및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는 학교와 사회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정글의 법칙을 배워왔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사회는 점점 사랑이 줄어들고 나눔이 배고파졌으며 배려가 굶주려가고 있다. 결국 ‘더불어’, ‘함께’, ‘같이’,란 단어들이 서서히 도태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가 진단해봐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글의 법칙만 내세우기보단 감정시수를 높여 사랑과 나눔의 법칙을 모두 다함께 세워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고 약자가 강자가 됐을 때 또다시 약자를 돌봐주는 그런 사랑의 릴레이 말이다. 기관과 단체, 모두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면 아마 양평군은 정말 살맛나는 이상적인 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 ,본인의 생활신조와 좌우명 간단한 가족사항을 소개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신조가 하나 있다면 ‘원칙을 버리지 말자’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 그래도 원칙이란 틀을 깨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실수는 죄가 되어가고 죄는 양심을 잃어 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작은 원칙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때론 일부 사람들에겐 상처가 되기도 오해를 낳기도 한다. 그럴 땐 다시 초심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가족관계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과 곧 한 아이의 아빠가 될 막내아들과 딸과도 같은 예쁜 며느리가 있다. 또 곧 웨딩드레스를 입을 딸이 있는데 딸이 결혼하면 아들이 하나 더 생길 것 같다.
    • 초대석
    2011-05-26
  • 세계 3대 빈국 미얀마인을 향한 일편단심 사랑, 이천 다사랑 다문화센타 설립자, 박희영
    “사랑의 본질은 ‘지극히 작은자를 향한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허리가 부러진 베트남 근로자의 생명을 구하다.” 2010년 3월 박희영씨는 이천의료원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효자였던 그는 11년전부터 중풍으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집에서 모셔왔다. 3년 전부터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로 모친의 건강이 위중해졌고 수시로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옮겨 다녀 박씨의 애를 태웠다. 3월 중순, 그는 이천의료원 2층 복도에서 동남아 근로자 3-4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리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그들은 경기 광주의 버섯농장에서 일하다가 동족 불량배들의 집단 폭행을 피해 2층 기숙사애서 뛰어내리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해 입원한 베트남 여인(화,34)의 농장 동료들인 베트남 근로자들이었다. ‘화’는 1달째 입원 중 이었으나 돌봐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근무 중 사고가 아니라 고용주도 그를 외면했다. 수술비가 500만원이 드는 큰 수술이라 동료들도 한숨만 쉬고 있던 터였다. 딸의 사고소식을 전화로 전해들은 가족들은 여비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울고있었다. 딸이 보내오던 돈으로 살아가던 가족들(그녀의 3자녀 포함)에게는 큰 청천병력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동료들은 한국인들마다 붙들고 딱한 그녀의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그들은 마침 지나가던 박씨를 잡고 호소를 했다. 당시 박씨는 자신도 부친, 모친의 병으로 양쪽을 돌보느라 지쳐있었지만, 그들의 눈물의 호소를 들은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광주에서 외국인들을 돌보는 조선족 교회 박종일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목사의 도움으로 폭행가해자 5명중 2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치료비는 댈 능력이 없어 추방되는데 그쳤다. 박희영씨는 이천의료원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의료원장은 친분도 없는 박씨의 사랑에 감동해 500만원의 수술비를 80만원으로 절감시켜주었다. 퇴원때까지 ‘화’를 돌보아주었음은 물론이다. 퇴원후에도 몸조리를 못하는 그녀를 위해 6월 회사를 찾아가 휴가를 얻도록 고용주를 설득해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가족품안에서 간병을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녀가 항공비가 전혀없었고, 몸도 불편해 못가는 상황이 되자 박씨는 항공비결제를 자신의 카드로 끊어주고 베트남 가족에게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게된다.베트남 하노이 공항에서 가족들에게 ‘화’를 인계해주고, 3시간후 박씨는 다시 미얀마행 비행기를 탔다.“베트남가족들과의 눈물의 만남과 가족들의 극진한 접대”‘화’의 가족들은 박씨에게 자신들의 고향을 방문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간절한 그들의 감사의 초대를 거절하면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박씨는 3주일동안 미얀마에서 봉사하다가‘화’의 가정을 방문한다. 마을에서는 25-6명의 친지들이 모여 감사를 표하고 3일 동안 극진히 박씨를 대접하였다. 집에서 기르는 몇 안되는 씨암닭, 오리를 매일 한 마리씩 잡아서 대접하였다. 오빠는 양어장을 했고, 남편은 한국에 오고파 한글 공부를 하고 있었다.“한때는 나이트클럽 부지배인 까지 지냈던 시절도 있었죠.”박희영씨(56)는 서울 마포 출신으로 한때는 주먹세계를 전전하던 어두웠던 과거도 있었다. 고교시절 교사와의 불화로 제적을 당하기도 했고, 명동 나이트클럽 부지배인을 지냈던 시절도 있었다. 군은 특전사를 지원해 중사계급까지 달았다. 사업을 하면서 분양대행이 성공해 큰돈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얻은 것은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교사의 학생들에 대한 비교육적인 폭언에 대한 항거해보았고, 나이트클럽 주먹선배들의 비윤리적인 행동들에 실망해 주먹세계를 탈퇴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부마사태 때 국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장면들을 등을 보며 군에서 자원 제대를 하였다. 분양 성공으로 큰돈을 만졌을 때에도 그는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이천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종교생활을 누리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평소에도 무슨 일을 하던지 형식과 허례를 싫어하고 본질을 추구했던 그는 교회의 본질이 ‘지극히 작은자 대한 무조건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세계 삼대 빈국중 하나인 미얀마를 주목했다. 작은 힘이나마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그는 짬짬이 돈을 모아 드디어 첫 행동에 옮긴다. 1997년 12월 그는 처음으로 250만원을 가지고 미얀마 행 비행기에 올랐다. 5시간의 비행 끝에 태국에 도착, 3시간을 대기하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을 더 날아가 양곤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통역을 고용해 10$이내 숙박시설인 게스트 하우스나 현지인 집에서 머물며 25일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거기서 그는 최악에 상황에서도 불평 없이 가족 간에 사랑하며 사는 그들에게서 큰 평안을 맛보았다. 1달 월급 6만 여원으로 자녀를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소망없이 사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의약품을 구입해 치료도 해주며, 한국에서 볼펜 문구류, 연예인 사진 등을 가져가 선물하는 등 가져간 자금을 모두 그들을 위해 쓰고 귀국했다. 그후 1998년 5월경 미얀마에 쓰나미가 덮쳤다. 불과 20여시간만에 12만 7천여명이 사망하고 수백만의 국민들이 집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미얀마인들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는다. 즉시 가진돈 3백여만원을 가지고 바로 재 방문길에 오른다. 첫 번째 한국의 긴급 구호단원들이 그와 동행을 했다. 이번엔 1달을 거주하며 쓰나미가 발생한 인근 지역에 머물며 매일 1가정씩 방문하며 그들에게 빵,바나나,약품 등과 거기에 그가 가진 깊은 사랑을 공급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한글을 가르켰다. 미얀마인들은 한글을 배워 한국에가 성공하는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지에 한글교실을 세워 한글과 컴퓨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0여명의 현지인들이 몰려 공부하고 꿈을 키워나갔다.그곳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한국어 시험에 합격해 근로취업에 성공해 한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노력이 그들에게 큰 도약의 기회로 다가갔던 것이었다. 1년 학비 몇 백원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그들에게 박씨의 물심양면 지원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박희영, 그는 미얀마가 그의 삶에 전부가 되었다. 금,은,보화를 밭에 몰래 묻어두고 매일 혼자 꺼내보고 기뻐하는 부자처럼, 그는 미얀마에서 발견한 보물을 꺼내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혼자서 1년에 2번씩 계속 감춰놓은 보물을 보러 미얀마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에서 버는 모든 수입은 그때마다 가지고가 베푼다. 앞으로 그의 소망은 미얀마로 이민가 그들과 여생을 함께 하는 것 이다. 금년 5월말에 그는 제과 제빵 기술학원에 등록할 예정이다. 4개월 코스다. 제빵기술이 그들에게 긴요하다고 느낀 때문이다. 그들에게 물고기보다 낚시대를 주고픈 그의 마음이 그를 제빵학원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이 많다. 생업을 먼저 챙겨라!, 혼자하지 말고 여럿이 함께 해라! 교회에 더 충실해라! 등등 하지만 그의 가슴속을 헤아리는 이는 매우 적었다. 가슴속에 수많은 빈자(貧者)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는 그를 판단하고 충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는 한국에 있는 날에도 한국에 온 그의 미얀마 제자들(미얀마에서 한글을 지도했던 학생들)을 만나러 다닌다. 제자들은 한국에 와서도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는 그때마다 그들을 만나러 수원, 남양주, 부평...달려간다. 자식들이 보고픈 엄마처럼... 2008년 11월에는 이천에 다문화 센타를 설립(다사랑 다문화 센타)하여 수년간 손수 차량을 운행하며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글지도 및 돌봄에 앞장서 왔다.
    • 초대석
    2011-05-26
  • 세계 3대 빈국 미얀마인을 향한 일편단심 사랑, 이천 다사랑 다문화센타 설립자, 박희영
    “사랑의 본질은 ‘지극히 작은자를 향한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허리가 부러진 베트남 근로자의 생명을 구하다.” 2010년 3월 박희영씨는 이천의료원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효자였던 그는 11년전부터 중풍으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집에서 모셔왔다. 3년 전부터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로 모친의 건강이 위중해졌고 수시로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옮겨 다녀 박씨의 애를 태웠다. 3월 중순, 그는 이천의료원 2층 복도에서 동남아 근로자 3-4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리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그들은 경기 광주의 버섯농장에서 일하다가 동족 불량배들의 집단 폭행을 피해 2층 기숙사애서 뛰어내리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해 입원한 베트남 여인(화,34)의 농장 동료들인 베트남 근로자들이었다. ‘화’는 1달째 입원 중 이었으나 돌봐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근무 중 사고가 아니라 고용주도 그를 외면했다. 수술비가 500만원이 드는 큰 수술이라 동료들도 한숨만 쉬고 있던 터였다. 딸의 사고소식을 전화로 전해들은 가족들은 여비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울고있었다. 딸이 보내오던 돈으로 살아가던 가족들(그녀의 3자녀 포함)에게는 큰 청천병력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동료들은 한국인들마다 붙들고 딱한 그녀의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그들은 마침 지나가던 박씨를 잡고 호소를 했다. 당시 박씨는 자신도 부친, 모친의 병으로 양쪽을 돌보느라 지쳐있었지만, 그들의 눈물의 호소를 들은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광주에서 외국인들을 돌보는 조선족 교회 박종일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목사의 도움으로 폭행가해자 5명중 2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치료비는 댈 능력이 없어 추방되는데 그쳤다. 박희영씨는 이천의료원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의료원장은 친분도 없는 박씨의 사랑에 감동해 500만원의 수술비를 80만원으로 절감시켜주었다. 퇴원때까지 ‘화’를 돌보아주었음은 물론이다. 퇴원후에도 몸조리를 못하는 그녀를 위해 6월 회사를 찾아가 휴가를 얻도록 고용주를 설득해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가족품안에서 간병을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녀가 항공비가 전혀없었고, 몸도 불편해 못가는 상황이 되자 박씨는 항공비결제를 자신의 카드로 끊어주고 베트남 가족에게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게된다.베트남 하노이 공항에서 가족들에게 ‘화’를 인계해주고, 3시간후 박씨는 다시 미얀마행 비행기를 탔다.“베트남가족들과의 눈물의 만남과 가족들의 극진한 접대”‘화’의 가족들은 박씨에게 자신들의 고향을 방문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간절한 그들의 감사의 초대를 거절하면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박씨는 3주일동안 미얀마에서 봉사하다가‘화’의 가정을 방문한다. 마을에서는 25-6명의 친지들이 모여 감사를 표하고 3일 동안 극진히 박씨를 대접하였다. 집에서 기르는 몇 안되는 씨암닭, 오리를 매일 한 마리씩 잡아서 대접하였다. 오빠는 양어장을 했고, 남편은 한국에 오고파 한글 공부를 하고 있었다.“한때는 나이트클럽 부지배인 까지 지냈던 시절도 있었죠.”박희영씨(56)는 서울 마포 출신으로 한때는 주먹세계를 전전하던 어두웠던 과거도 있었다. 고교시절 교사와의 불화로 제적을 당하기도 했고, 명동 나이트클럽 부지배인을 지냈던 시절도 있었다. 군은 특전사를 지원해 중사계급까지 달았다. 사업을 하면서 분양대행이 성공해 큰돈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얻은 것은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교사의 학생들에 대한 비교육적인 폭언에 대한 항거해보았고, 나이트클럽 주먹선배들의 비윤리적인 행동들에 실망해 주먹세계를 탈퇴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부마사태 때 국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장면들을 등을 보며 군에서 자원 제대를 하였다. 분양 성공으로 큰돈을 만졌을 때에도 그는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이천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종교생활을 누리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평소에도 무슨 일을 하던지 형식과 허례를 싫어하고 본질을 추구했던 그는 교회의 본질이 ‘지극히 작은자 대한 무조건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세계 삼대 빈국중 하나인 미얀마를 주목했다. 작은 힘이나마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그는 짬짬이 돈을 모아 드디어 첫 행동에 옮긴다. 1997년 12월 그는 처음으로 250만원을 가지고 미얀마 행 비행기에 올랐다. 5시간의 비행 끝에 태국에 도착, 3시간을 대기하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을 더 날아가 양곤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통역을 고용해 10$이내 숙박시설인 게스트 하우스나 현지인 집에서 머물며 25일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거기서 그는 최악에 상황에서도 불평 없이 가족 간에 사랑하며 사는 그들에게서 큰 평안을 맛보았다. 1달 월급 6만 여원으로 자녀를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소망없이 사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의약품을 구입해 치료도 해주며, 한국에서 볼펜 문구류, 연예인 사진 등을 가져가 선물하는 등 가져간 자금을 모두 그들을 위해 쓰고 귀국했다. 그후 1998년 5월경 미얀마에 쓰나미가 덮쳤다. 불과 20여시간만에 12만 7천여명이 사망하고 수백만의 국민들이 집을 잃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미얀마인들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는다. 즉시 가진돈 3백여만원을 가지고 바로 재 방문길에 오른다. 첫 번째 한국의 긴급 구호단원들이 그와 동행을 했다. 이번엔 1달을 거주하며 쓰나미가 발생한 인근 지역에 머물며 매일 1가정씩 방문하며 그들에게 빵,바나나,약품 등과 거기에 그가 가진 깊은 사랑을 공급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한글을 가르켰다. 미얀마인들은 한글을 배워 한국에가 성공하는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지에 한글교실을 세워 한글과 컴퓨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0여명의 현지인들이 몰려 공부하고 꿈을 키워나갔다.그곳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한국어 시험에 합격해 근로취업에 성공해 한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노력이 그들에게 큰 도약의 기회로 다가갔던 것이었다. 1년 학비 몇 백원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그들에게 박씨의 물심양면 지원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박희영, 그는 미얀마가 그의 삶에 전부가 되었다. 금,은,보화를 밭에 몰래 묻어두고 매일 혼자 꺼내보고 기뻐하는 부자처럼, 그는 미얀마에서 발견한 보물을 꺼내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혼자서 1년에 2번씩 계속 감춰놓은 보물을 보러 미얀마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에서 버는 모든 수입은 그때마다 가지고가 베푼다. 앞으로 그의 소망은 미얀마로 이민가 그들과 여생을 함께 하는 것 이다. 금년 5월말에 그는 제과 제빵 기술학원에 등록할 예정이다. 4개월 코스다. 제빵기술이 그들에게 긴요하다고 느낀 때문이다. 그들에게 물고기보다 낚시대를 주고픈 그의 마음이 그를 제빵학원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이 많다. 생업을 먼저 챙겨라!, 혼자하지 말고 여럿이 함께 해라! 교회에 더 충실해라! 등등 하지만 그의 가슴속을 헤아리는 이는 매우 적었다. 가슴속에 수많은 빈자(貧者)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는 그를 판단하고 충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는 한국에 있는 날에도 한국에 온 그의 미얀마 제자들(미얀마에서 한글을 지도했던 학생들)을 만나러 다닌다. 제자들은 한국에 와서도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는 그때마다 그들을 만나러 수원, 남양주, 부평...달려간다. 자식들이 보고픈 엄마처럼... 2008년 11월에는 이천에 다문화 센타를 설립(다사랑 다문화 센타)하여 수년간 손수 차량을 운행하며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글지도 및 돌봄에 앞장서 왔다.
    • 초대석
    2011-05-26
  • “은행보다 친절한 증포동” 김진목 증포동장
    은행이나 이마트를 아침오픈 시간에 방문했다가 전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갈 때 마치 왕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고 과분한 인사를 받으며 송구스러워 한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2007년도에 인감, 등본 발급부서에 민원인 7-8명이 둘러싸 접수 순위가 바뀔까 두려워 민원인들 스스로 접수순위를 감시하며 주민등록증을 앞쪽으로 경쟁하듯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혹 나중온 민원인이 주민증이나 신청서를 먼저 온 사람보다 앞에 놓으면 소란이 일어나곤 했다. 그 당시 필자는 동민의 일원으로서 동장님께 은행보다 편리하고, 친절한 동사무소를 보고 싶다는 증포동민으로서의 염원을 차 한 잔 나누며 말씀드린바 있었다. -증포동의 변신이 놀랍다.“2008년 처음 직원회의 때 ‘은행보다 친절한 동사무소’란 주제를 꺼내니 모두 동의를 했지만 민원인들의 냉소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모두 도전하고 싶어 했다. 내부적으로 조용히 1 년 여간 준비해왔다. -“기대 그이상의 감동, 은행보다 친절한 증포동을 만들겠습니다.“라는 플랭카드를 민원창구 밑에 걸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그 표어를 걸기까지 나름 많은 준비를 했다. 국민은행 친절강사를 초빙해 강의도 받고, ‘잠들지 않는 행정서비스’를 표방해 섬김 행정으로 알려진 안산시청, 친절서비스의 대명사인 삼성전자 서비스 센터, 한전, 하나은행 안산지점,...전국 10여 곳의 최상급 친절 관공서나 기업을 방문 벤치마킹을 했다.내부적으로 퇴근 후 15명의 직원들이 매주 모여 실천방안을 놓고 회의도 하고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일찍 출근해 인사법을 실행해 보는 등 직원들의 노력이 많았다.“ -실제 달라진 사례를 든다면...“첫째는 시민들을 섬기겠다는 자세로 부단히 노력하는 직원들의 마음의 변화가 달라졌고그 외 월 1회 주민자치자원봉사단(18명)의 민원친절도 모니터링 및 개선을 위한 간담회 개최, 인감,등본 순서번호 발급기 설치, 매분기별 주민들의 만족도 여론조사, ‘주민소리함’을 입구 복도에 설치, 매주 월요일 아침 8시 40분에 실시하는 인사응대 연습, 각종 서식 진열대에 예시서식 비치, 커피 자판기 가격인하(200-100), 노인, 장애우를 위한 행정 도우미 배치, 민원인용 휴대폰 충전기, 팩스 설치, 수유실, 신문대 완비, 민원인 용 잡지 구비,...이다.“-이천시의 평가 성적은?“2008년 전화 친절도 조사에서 시내 14개 읍,면,동 중 1,2,3회 모두 1위를 했다.그리고 동년 이천 시내 42개 부서(28개 실과소,14읍면동) 주요업무 자체평가 결과 최우수 평가,2010년 1회차 3위,3회차 1위,4회차 1위,2010 행정변화 평가제인 마일리지운영결과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앞으로 목표가 있다면?“15명의 직원으로 42000명을 섬기다보니 직원들 마음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겸손히,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직원들이 동민들을 가족처럼 섬기려는 의지가 강한만큼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린다. 추진목표는 ‘친절히 섬기는 전국 제일의 관공서 지향’이다.”이천 증포동 주민이며 주민자치위, 노인회 고문인 이재룡씨는 “김진목 동장의 솔선수범하는 지도력과 직원들의 섬김의 자세, 불철주야 희생하는 주민자치 위원들과 박인오 위원장, 주민자치 봉사대원들과 신해진 봉사대장의 3 Top 체재의 희생봉사 결과 증포동이 ‘은행보다 친절한 동으로 거듭난 비결이라 생각하며 원로로써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 초대석
    2011-05-26
  • “은행보다 친절한 증포동” 김진목 증포동장
    은행이나 이마트를 아침오픈 시간에 방문했다가 전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갈 때 마치 왕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고 과분한 인사를 받으며 송구스러워 한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2007년도에 인감, 등본 발급부서에 민원인 7-8명이 둘러싸 접수 순위가 바뀔까 두려워 민원인들 스스로 접수순위를 감시하며 주민등록증을 앞쪽으로 경쟁하듯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혹 나중온 민원인이 주민증이나 신청서를 먼저 온 사람보다 앞에 놓으면 소란이 일어나곤 했다. 그 당시 필자는 동민의 일원으로서 동장님께 은행보다 편리하고, 친절한 동사무소를 보고 싶다는 증포동민으로서의 염원을 차 한 잔 나누며 말씀드린바 있었다. -증포동의 변신이 놀랍다.“2008년 처음 직원회의 때 ‘은행보다 친절한 동사무소’란 주제를 꺼내니 모두 동의를 했지만 민원인들의 냉소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모두 도전하고 싶어 했다. 내부적으로 조용히 1 년 여간 준비해왔다. -“기대 그이상의 감동, 은행보다 친절한 증포동을 만들겠습니다.“라는 플랭카드를 민원창구 밑에 걸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그 표어를 걸기까지 나름 많은 준비를 했다. 국민은행 친절강사를 초빙해 강의도 받고, ‘잠들지 않는 행정서비스’를 표방해 섬김 행정으로 알려진 안산시청, 친절서비스의 대명사인 삼성전자 서비스 센터, 한전, 하나은행 안산지점,...전국 10여 곳의 최상급 친절 관공서나 기업을 방문 벤치마킹을 했다.내부적으로 퇴근 후 15명의 직원들이 매주 모여 실천방안을 놓고 회의도 하고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일찍 출근해 인사법을 실행해 보는 등 직원들의 노력이 많았다.“ -실제 달라진 사례를 든다면...“첫째는 시민들을 섬기겠다는 자세로 부단히 노력하는 직원들의 마음의 변화가 달라졌고그 외 월 1회 주민자치자원봉사단(18명)의 민원친절도 모니터링 및 개선을 위한 간담회 개최, 인감,등본 순서번호 발급기 설치, 매분기별 주민들의 만족도 여론조사, ‘주민소리함’을 입구 복도에 설치, 매주 월요일 아침 8시 40분에 실시하는 인사응대 연습, 각종 서식 진열대에 예시서식 비치, 커피 자판기 가격인하(200-100), 노인, 장애우를 위한 행정 도우미 배치, 민원인용 휴대폰 충전기, 팩스 설치, 수유실, 신문대 완비, 민원인 용 잡지 구비,...이다.“-이천시의 평가 성적은?“2008년 전화 친절도 조사에서 시내 14개 읍,면,동 중 1,2,3회 모두 1위를 했다.그리고 동년 이천 시내 42개 부서(28개 실과소,14읍면동) 주요업무 자체평가 결과 최우수 평가,2010년 1회차 3위,3회차 1위,4회차 1위,2010 행정변화 평가제인 마일리지운영결과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앞으로 목표가 있다면?“15명의 직원으로 42000명을 섬기다보니 직원들 마음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겸손히,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직원들이 동민들을 가족처럼 섬기려는 의지가 강한만큼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린다. 추진목표는 ‘친절히 섬기는 전국 제일의 관공서 지향’이다.”이천 증포동 주민이며 주민자치위, 노인회 고문인 이재룡씨는 “김진목 동장의 솔선수범하는 지도력과 직원들의 섬김의 자세, 불철주야 희생하는 주민자치 위원들과 박인오 위원장, 주민자치 봉사대원들과 신해진 봉사대장의 3 Top 체재의 희생봉사 결과 증포동이 ‘은행보다 친절한 동으로 거듭난 비결이라 생각하며 원로로써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 초대석
    2011-05-26
  • 어려운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선행 기업인 ‘꿈에그린김치’ 한상화 대표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함께 살라!’는 모친의 유언을 잊지못하는 막내 아들” “절망에 빠진 이웃들의 언덕이되어 주고,그들이 일어서서 또다른 이웃을 일으키는 모습 보는것이 꿈” “이천보건소 방문간호사들은 어려운 가정들을 정말 사랑하는 분들이예요.” 오래전 율면 농협 방병건조합장이 이천 농협 근무시 “이천에서 한상화씨 만한 봉사자 보기가 쉽지않다.”칭찬을 들었었다. 평소 박 조합장의 훌룡한 인품을 잘알고 존경해 마지않던 필자는 그의 한마디로 한상화씨의 인품을 가늠할수 있었다. 한상화씨에게 취재를 요청했을때, 그는 강하게 자신보다 자신이 기부하는 김치를 소외계층에 전달해주는 이천시 보건소 방문간호사님들이 자신보다 더 훌룡하다며 향기나는 공무원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의 소개는 사양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진심으로 간호사들게 고마워한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단순전달이 아닌 가정방문시 김치조리법등을 알려주며 한집 한집 뜨거운 사랑으로 어려운 가정들을 돌보며 사랑을 함께 전달하는 보건소 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보건소장(심평수)은 자신들이 하는일은 당연한 직무이기에 칭찬은 한 사장이 받아야 한다고 공을 한사장에게 돌렸다. 제날짜에 김치를 기부못할 때 한 사장이 보건소 간호사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깜짝놀라는 모습을 보았어요.수년째 기부를 하면서도 생색은 커녕 기부날짜가 늦는다고 미안해 어쩔줄 모르더라구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예요.” 라며 방문간호사들은 칭찬한다. 한상화(52)씨는 호법 동산리 출신으로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홀어머니는 힘들게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셨다. 어머니는 3살 때 어머니(외할머니)를 여위셨다. 엄마의 사랑이 목말랐던 어머니는 이웃의 어른들을 유난히 살갑게 잘 섬겼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 채우셨던것 같아요.돌아 가실때도 막내인 제손을 잡고 어려운 이웃들의 힘이 되어 주어라. 약속해라!”라며 약속을 받고 돌아 가셨다 한다. 이천중,여주고,농협대 마케팅 리더 과정을 마친 그는 79년 용산 농산물 도매시장 근무를 시작으로 88년 가락시장‘서울청과’에서 농산물 중개인으로 일했다.그러나 사업은 큰 실패를 당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할수없이 고향인 이천으로 내려왔다. 그때가 36세 되던 96년이었다. “사업실패후 고향으로 내려와 빈손으로 다시 시작했지요.” 고향에서 실패한 모습으로 밑바닥부터 새출발하기가 어려웠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그는 수치심을 느끼는것도 사치였을 정도로 어려웠다. 말없이 자신을 내조하며 고생하는 아내(정호천,48)와 딸들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이를 악물고 아내와 중앙시장뒤에 작은 청과물 가게를 내고 장날에는 양평,장호원등 인근지역을 다니며 노점상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파티마 병원앞 산업도로변에 리어카 좌판 과일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 시기에 아내가 버팀목이 되주어 재기할수 있었다. 아내가 나를 믿어주고 불평한마디 안하는데 내가 좌절할수는 없었다.”라고 한사장은 회고한다. 청송유통을 설립하고 99년도에 이천 영농조합(주)을 설립했다. 2005년 2월 청강대 식품생명공학과와 2006년 수원대와의 산학협력계약 체결은 ‘꿈에 그린 김치’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된다. “국내 최고의 김치로 인정받다.” 그가 개발한 ‘꿈에 그린 김치’는 2005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전국 최대 김치 품평회(130여 업체 참여)에서 영양,청결도,맛 심사에서 2등인 금상을 수상하였다. 연 500톤을 생산 하이닉스,신세계푸드에 납품된다. 2006년에는 김치부문에서 스포츠 서울이 선정한 2006년 베스트 이노베이션 기업&브랜드 상을 수상하였다. 전국의 유망 영농조합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변화와 자기혁신을 통해 기업가치를 스스로 높여가는 기업들을 각 부문별로 최고의 기업을 한개씩 선정,보도하는데 김치부문의 최고로 선정된것이었다. 국산재료만 사용하고 수삼을 첨가 항암효과가 탁월하며 암반수를 이용한 오존수공법 세척으로 농약,기생충 수은 등 유해물질을 완벽히 제거해 맛,위생, 청결도에 있어 전국 2위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것이었다. “고향 이천을 아끼고 사랑하는 향토 기업인” 그는 이천 경제활성화에 큰 기여를 한다. 이천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큰존재이다. 다. 그가 팔아주는 대파만 해도 계약재배면적이 20만평(200여농가 거래)이나 되며 연 5000여톤이상을 수매한다. 양파는 10만평 계약 재배예정이다.(올해 2000톤 수매 예정) 직 고용 인원만 60여명이다. 신세계 푸드, GS 리테일, 동원 홈푸드,풀무원,샤니,이마트,청주 농협 등 대기업에 납품한다. 가능한 이천 지역 농산물, 과일을 최우선 구매를 원칙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내에게 명품가방은 못사줘도 어려운 가정에 매월 천만원씩 기부하고픈 사람” 그는 늘 부지런하고 검소하다. 취미는 열심히 일하는것이 유일한 낙이다.그는 이천을 아낀다. 옷 등 모든 소비는 이천에서만 한다. 전국에 납품하는 모든 농산물,과일등 가능한 이천에서 구입을 원칙으로한다. 이천에서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늘 기억하고 늘 갚으며 살고 있다. 한사장에게 “아내가 요즘 유행하는 유명브랜드 한번 사달란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가방이 50만원 이상 가는 제품을 사러 여주 ‘첼시’에 가는 여성들이 많다고 했더니 “웬 가방이 그렇게 비싸냐”며 진짜로 놀란다. 표정을 보니 부인이 사달라고 한적이 없는 표정이 확실하다. 그런 그가 매월 3-4백만원이상의 기부를 한다. 월 1000만원 상당의 기부가 그의 목표란다. 명품가격 얘기할때는 낮설어 하던 표정에서 기부얘기를 할때는 바로 생기를 되찾는다. 이천에서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잘 섬기는 시설로 소문이난 비인가 시설인 ‘믿음의 집’ 조성구 원장은 “우리시설이 비인가 시설이라 노인들에게 생각처럼 잘해드릴수 있는 여건이 못되어 늘 가슴 아팠는데 한사장님의 도움으로 야채 과일 등 6여년간 큰 후원을 받아왔다. 자신의 자랑도 없이 친자식들도 자신의 부모조차 대접을 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는 28명의 소외된 노인들에게 과일등을 아끼지 않고 후원하였다. 어려운 여건속의 시설들이 유지되고 있는 비결은 한 사장같은 숨은 독지가들 덕분이다.”라며 고마워 한다. 이천 보건소에 근무하는 박흥미씨는 5년전에 어려운 가정들을 돌아보는 보건소 방문간호사들이 어려운 가정 때문에 가슴아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사장님이 “매월 100 박스씩 김치를 제공할테니 힘든 가정에 전달해달라셔서 몇 번 해주시겠지 했는데 5년이 넘었어요.김치값이 올라 ‘금치’라 부를때도 약속을 지키셨지요. 우리가 그분께 고마워하고 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고마워 한답니다. 이천에 그렇케 영혼이 깨끝한분이 또 있을까요?”
    • 초대석
    201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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