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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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 관한 MOU를 체결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윤두현 서경한우 조합장.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윤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서경한우 윤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서경한우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 삼는 선순환 구조로 최고의 조합으로 발돋움시킬 터자체프로그램 중간 마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 저렴한 사료 조합원에게 공급5월 서경한우 더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 직영판매장 오픈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안녕하십니까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윤두현입니다.최근 본사와 가공공장 등이 화재로 전소되어 주위에서 우려해 주시고 아픔을 같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겠다는 신념하에 신속한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에 대해 간단히 소개 한다면 ?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농림축산식품부가 한우 전문 품목협동조합으로 인가하여 2012년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460여 조합원과 함께하는 중견급 조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50개월 이내 한우 암소를 유통하는 전문 조합으로서 자체 도축가공과 소매유통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수도권 한우의 가치를 높이는 견인마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서경한우는 수도권 축산업을 지켜내며 농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지역경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질 좋은 청정 한우 생산’을 목표로 조합원의 안정적인 소득향상과 바람직한 한우 먹거리 공급이라는 두 마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합원 임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질 좋은 한우 암소 고기를 저렴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가격의 현실화를 이룩하였고 이와 함께 품질 고급화와 다양한 메뉴를 개발 공급하여 직영판매식당을 이용하는 고객 누구나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 좋은 결실을 얻고 있습니다.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금용사업을 하고있지 않고 있으며, 소를 어떻게 잘 팔것인가?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에 집중하는 협동조합입니다3. 서울경기 한우협동조합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과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서경한우 자체프로그램으로 중간 마진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하여 저렴한 사료를 조합원에게 공급하고 있으며 초음파 및 거세 지원 등 다양한 사양지도 사업 등으로 조합원분들이 한우를 잘 키우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한우 지역 축산농가와의 동반성장을 목표로 매년 자체도축 비율을 높여왔으며, ‘돌보미사업장’ 활성화를 통해 ‘대리 축산영농 시스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서경한우는 조합원의 소득 증대를 핵심 이념으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왔습니다. 자체도축은 지난해 기준 833두이며, 올해는 약 50% 정도 늘어난 1,200두로 예상됩니다. 또 올해 이익은 5억 원 규모로 예상되는데요, 이중 2억 7천만 원은 배당금으로서 조합원의 몫입이다.”서경한우는 또 비대면 유통망 확충에도 힘 쏟고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온라인 판매 실적이 크게 향상되면서 온라인 마켓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4억 규모였던 매출액이 금년에는 무려 15억 규모로 성장했다.4.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윤 조합장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5.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사항을 밝힌다면 ?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6.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그동안 추진사항과 앞으로의 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천지역은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면이 많습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7. 서경한우 직영 판매 식당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 부담없는 가격으로 프리미엄급 한우암소를 즐길수 있는 수도권 명소로 자리잡는 것을 비젼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고객분들이 이용해주셔서 나름 많이 알려졌지만 더욱 노력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8. 서경한우 암소 브랜드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고객의 관점에서 브랜드가 발전되어 가야 합니다. 고객 관점에서 생산, 유통시스템이 구축되고 발빠르게 대응해야 브랜드가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에 서경한우의 ‘한우 숙성기술 활용 저지방 부위 부가가치 향상 시범사업’에 대한 식미 평가를 진행했다. “자체 건식숙성고에서 다양한 기간 숙성을 진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40일 건식숙성이 최상의 맛을 끌어낸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최상급 한우고기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2~3등급 저지방 한우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드라이에이징 기술을 활용한다면, 깊고 뛰어난 풍미를 더할 수 있기에 독자적인 상품성을 갖추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숙성(Aging) 이란 일정 기간 온도, 습도, 바람 등 숙성환경을 유지해 고기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는 기술로 숙성방법에 따라 건식과 습식으로 나뉩니다. 서경한우의 뛰어난 건식숙성기술에 40일의 기다림이 더해지면 2∼3등급의 저지방 한우고기도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풍미와 감칠맛이 향상됩니다. 우리 조합은 앞으로도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조건을 찾아 서경한우만의 기술을 만들어갈 것이며, 이를 통해 지역 한우농가의 소득 향상에도 기여하겠습니다.9. 어려운 경제속에서 직영 판매식당의 가격 할인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면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10. 주민들과 조합원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 ? 서경한우를 사랑해주시고 이용해주신 고객분들과 조합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더욱 발전되고 좋은 서비스로 함께하는 서경한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초대석
    • 초대석
    2023-04-26
  • 황순철 모가농협조합장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으로 발돋움시킬 터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조합원들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 최선의 노력 하는 조합장 될 터"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입니다.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또한,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황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모가농협 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모가농협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신 소득 작목 발굴 지원해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 넓혀가도록 계획 농협 주인인 조합원 섬기며 실익과 권익보호 농가소득 극대화시켜 나갈터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인사드립니다. 코로나19와 조류인플루엔자가 확산하여 발생되는 힘든 시기에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2021년 새해에는 건강하게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2, 모가농협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조합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인구 4,500여명 정도의 모가면에 위치한 우리 농협은 1,350여명의 조합원님들과 22곳의 영농회로 구성되어 있는 소규모의 조합이지만 조합원님과 임직원 지역주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내실 있는 강소 농협으로 활발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모든 성과와 그에 따른 결과는 우리 조합원님들과 주민들의 협조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던 것같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 모가농협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 및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4. 이천지역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 입니다. 5. 초선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 사항을 밝힌다면?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6. 모가농협 그동안 추진 사항과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면?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7, 현재 농민 조합원들로부터 산물 벼를 수매하고 있는데 수매가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소신을 밝혀 달라?해마다 벼 수매가는 생산 농가와 농협 간의 입장 차이가 생기고 갈등 발생의 원인이 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2020년에는 긴 장마와 일조량의 편차로 수확량이 전년 대비 감소한 상황에서 수매가격의 결정은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줄어든 생산량만큼 소득보존의 일환으로 수매가격을 인상하여 서로의 입장에 만족할 수 있는 수매가를 형성시켰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벼 수매가격 인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앞으로 임금님표 브랜드관리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대해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예전에는 농산물 관련 브랜드를 자산적 개념이 아닌 농산품 이름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고 전문인력과 관리조직의 미흡 등으로 사후관리가 안 되어 브랜드화 효과가 저조하였지만, 임금님표의 철저한 브랜드관리를 통하여 생산 농산물에 대한 공통적인 품질관리 체계와 소비자 욕구에 맞는 다양한 포장 규격 및 감각적인 포장 디자인 개발 등 브랜드의 상품화 사후관리와 공동 홍보방안 마련 등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 등의 수립으로 현재까지는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지역과 상품의 인지도 명성도 생산의 지역적 유리성 특정기술도입 등의 여건을 고려해 세분화된 유형별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목표시장을 점차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9, 현재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역 대표적인 축제 취소와 지역경제가 침체 되고 있는데 그 해결 방안과 정책 방향 그리고 조합원들을 위한 대책을 밝힌다면? 농촌경제연구원의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농업의 공익적 기능 식량안보 귀농 귀촌 증가 등 농업 농촌의 중요성이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이제까지의 농촌관광이 가족 친화나, 미식 여행을 주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향후에는 농촌만이 제공할 수 있는 힐링 건강치유 심신 휴양 자연환경 및 생태환경체험 가족 친화 미식 여행 등의 여러 목적으로 세분화 및 확대 될 것으로 예측이 되어 추후 코로나19 종식 이후 농촌관광 수요 확대 및 마이크로 투어리즘 등 관광형태 변화에 대비하여 지자체에 농촌관광정책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추가로 지역경제 침체로 역경을 겪으시는 우리 조합원님들을 위하여 다양한 자금지원방안의 모색, 인력중개를 통한 인건비 절감 부가소득을 조성하기 위하여 작물 종자 및 모종 공급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10, 주민들과 조합원들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코로나19로 심리적,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느라 고생이 많으신 우리 농업인과 이천 시민여러분께 당부 말씀 올립니다. 2020년은 지난날의 평온한 하루 한주 한 달 일 년이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결속된 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언론에서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연일 보도하는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크시겠지만 개인 방역수칙과 지자체의 안내에 성실히 따라주셔서 우리 이천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겠습니다. 저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은 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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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3
  • 친정집 가난 극복을 위해 논 닷 마지기와 맞바꾼 장님남편 선택 결혼
    2019/11/21 12:50 입력 모범시민 발굴 시상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고 정주영회장의봉사정신 효행상수상 본문은 본지 신선재 칼럼위원이 故 정주영 회장이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거나 효행 및 가족사랑을 실천하여 사회의 귀감이 된 인사와 단체를 발굴 표창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제정된 명망 있는 상으로서 1문1답 식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ㅡ편집자 주ㅡ 1.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수상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저는 이 상이 대통령표창 이상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큰상을 받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삶을 살아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사회가 이를 인정해 준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하고 눈물이 납니다.저를 추천해준 이천향교에 감사하고 저 때문에 가슴에 응어리 졌을 어머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2.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친정 사정에 간단한 소개를 해 주십시오.저는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에서 1943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3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해가며 생계를 꾸려갔기에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문장초등학교를 입학졸업을 하였고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어보고 포기한 체 사회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며 생활해 왔습니다.3. 결혼을 하게 된 동기나 각오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제 나이 20살 되던 어느 날 시골의 고모부로부터 “인근동네 부잣집에 장님아들이 있는데 그 집으로 시집을 오면 논 닷 마지기를 준 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고모부를 졸라 댔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차라리 내가 물에 빠져 죽겠다”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하여 장님에게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당시 저는 가난이 너무 싫었고 친정도 살리고 또한 불상한 사람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고 보란 듯이 잘 살아보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4.결혼생활과 함께 그동안 가정생활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신다면? 1964년 12월 시집을 와보니 시댁은 비교적 부농으로 약7,000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농사가 기계화가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짓는 농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로 오죽하면 촌부자 일부자라고 일이 많았습니다. 식구로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을 비롯하여 환갑 된 시부모님 그리고 팔순의 시조부님이 계셨는데 시조부는 노환으로 치매까지 있으셨습니다. 3년여를 조석을 따로 차려 드리는 등 병수발을 들었고 1968년 시조부님이 돌아가시자 시어머님이 병을 얻어 몸져누우셨습니다.시어머니는 10여년을 해소 천식을 앓다 1979년에 돌아가셨고 이어서 이번에는 시아버님이 몸져누우셨고 아버님 역시 치매와 노환으로 15년간을 고생하시다 1995년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3년 친정어머님이 몸져누우셨습니다.나로 인한 평생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불쌍한 어머님을 편하게 보내드리리라 마음을 먹고 남편을 설득해 친정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마지막 3년 전부터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고생을 하시다 2017년 돌아가셨습니다.5.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결혼 한지 14개월 만에 첫 아들을 낳고 10여년간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다행이 모두 정상아로 태어나 감사하나 “아버지가 장님인지라 다른 애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학교 가는 자녀들을 뒤 따라 가는가 하면 몰래 교실을 훔쳐보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을 수시로 찾아가기도 하고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내 집처럼 드나 들다보니 교장선생님께서 “부교사로 임명 해야겠다”며 1979년 어머니회장을 맡겨 그로부터 중학교까지 13년간 자모회 활동을 하였습니다.6. 바쁜 생활 속에서도 시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하던데요?1969년부터 10여년간 이천군 생활개선회장을 비롯해 79년부터는 새마을부녀회장 10여년을 맡으면서 농촌부엌과 화장실개량 꽃밭, 꽃길 가꾸기 등 농촌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절미운동과 부녀회 공동밭 가꾸기 등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고 여기서 발생한 기금으로 마을 어르신들께 수시로 (고유 명절이나 어버이날, 삼복 날 등) 식사를 대접하고 매년 효도관광을 시켜드리는 등 내 부모 모시듯 보살폈습니다.이밖에도 초, 중학교 어머니회장 13년, 자유총연맹 백사여성회장4년, 성균관 유도회 백사여성회장4년 등 40여년 간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했습니다.7. 농사가 많은데다 앞 못 보는 남편은 일을 못하고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네요?1964년 시집왔을 때만 해도 시부모님과 같이 손 모내기 손 벼 베기 등 재래식 농업으로 부모님을 도와가며 농사를 지었으나 농촌도 기계화가 되고 부모님이 일을 못하시게 되자 여자의 몸이지만 농기계 작동 법을 배워 77년부터는 손수 경운기로 두엄을 나르고, 논을 갈고, 써리고, 이앙기 탈곡기 등 기계화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가하면 담배, 고추 등 특용작물 재배, 양돈 등 안 해본 농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건강이 있었기에 가능 했던 것 같습니다.8. 힘든 삶을 살다 보면 초심을 잃고 후회도 했을 텐 데 이를 극복 할 수 있었던 비결은?저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가난에서 벗어나자! 불쌍한 남편을 살리자! 남에게 손가락 받지 말고 살자! 내가 택한 길 올바르게 남보란 듯이 살아보리라! 라는 신조로 살아 왔는데 끝까지 이를 지키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앞을 못 보는 장님의 특성이 남을 의심 하는 것이라 합니다.(특히 배우자) 어떤 때는 집안일을 팽개치고 사회활동을 위해 밖으로 나올 때는 마누라가 못마땅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고 격려해준 남편 덕에 감내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9. 그동안 생활을 해 오면서 감사와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첫째, 무엇보다도 내 옆에서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준 남편에게 감사하고요, 둘째,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자녀로 남들에게 따돌림 받고 자격지심이 있었을 텐 데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셋째, 평산 신씨의 며느리로, 집안으로, 이웃으로, 받아주고 위로 격려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계신 조읍1리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끝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며 타의 귀감이 되는 모범시민을 발굴해 시상해주는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저를 선정해 주신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류형복 기자가 만난사람 양강숙 사랑의요양원 원장
    2017/11/07 11:00 입력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 여가프로그램 개발 운영 사랑의요양원 원장 양강숙 사회복지사로써 요양원을 운영하게된 계기는?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와 삶의 질 높은 사랑의요양원 운영가을의 마지막 11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게 흘러 벌써 마지막 가을을 맞이하고 얼마 안 있으면 한해의 마지막까지 맞이하게 된다고 하니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저는 안산시 고잔동에서 사랑의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양강숙 입니다.요양원에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즐겁고 행복함을 느꼈기에 요양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현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 봉사활동내역을 소개를 한다면? 지난 8월 23일 사랑의 요양원과 밀리아나 경로당이 자매결연 협약 식을 가졌습니다.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갖게 된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지역사회에 계신 어르신들에게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자매결연을 추진 체결하여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앞으로 밀리아나 경로당에 쌀을 정기적으로 후원할 예정이며 이에 그치지 않고 경로당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약속했습니다.더욱이 노인의 날 지역 어르신들 모시고 식사 대접해 드리는 자리에 참여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앞으로도 꾸준히 할 생각이며 시간이 허락되면 생활이 어렵거나 독거노인 분들께 도시락 배달도 계속 참여할 생각입니다. 사랑의요양원의 조직과 구성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은 19인 시설로 현재 어르신 19분이 생활을 하고 계시며 시설 규모는 생활실 6개 프로그램 실 물리치료실을 완비 어르신들의 체력과 기능을 향상 유지시키는데 힘쓰고 있으며 종사자들은 시설장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8명 조리원 2명이 위생 신체활동 정서적인 지원을 하며 어르신들의 팔 다리가 되어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역 생활에 느낀 장, 단점과 원장의 역할에 대해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현재 우리나라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과 의료기술로 인하여 수명이 연장 되면서 노인인구는 급속히 증가되는 반면 젊은 세대들의 결혼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맞벌이 부부들이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자녀 출산에 대해 각종 양육비와 교육비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출산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 인구의 남녀노소 균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우리의 현실은 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제가 생활을 하고 있는 안산시 역시 예외가 아닌 노인 인구가 매우 많이 있는 가운데 도시락 배달을 하며 같은 건물과 인근에 누구는 지원을 받고 누군가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습니다. 이런 경우는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도시락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별적인 복지라 하여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더욱 지원이 필요한 분들이 먼저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몰라서 신청을 못하시는 분들도 많고 갑작스럽게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지원이 필요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노인뿐 아니라 소외계층 모두가 혜택을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설을 운영하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은 어르신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제공하고 생활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어르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능을 유지하고 발굴하여 향상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과정은 모두가 힘들지만 어르신이 점점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모두가 기뻐하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직책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의 운영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저희 사랑의 요양원은 무엇보다 불편한 노인 분들을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 되어 입소 노인 분들하고 임직원들이 일거수일투족 혼연일체가 되어 항상 즐거운 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어 높은 삶의 질을 만끽하시면서 편안한 생활과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립이념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소 노인 분들을 위한 치매예방을 위해 음악 미술 작업치료 웃음치료 등의 전문적인 치매예방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 하고 있습니다.또한 건강한 육체와 마음에서 건전한 생각을 갖고 생활을 할 수 있듯이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체조 수건체조 등 입소 노인 분들에 개별적으로 맞춤형 운동을 실시하는 신체기능강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풍요로운 여가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가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고 특히 사회적응훈련프로그램으로 예배 이, 미용 생신잔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을 느꼈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에 부부가 입소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치매 증상으로 우울증과 폭언이 심하셨습니다. 우울감이 심한 날은 식사도 거르고 힘없이 누워만 계셔서 항상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걱정도 많이 하시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저희는 할머니가 식사를 거르시면 죽을 드리고, 간식을 여러 번 제공하였고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가 가까운 시장에 모시고 가고 산책을 시켜 드리며 정서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셔서 폭언을 하는 날도 잦아들었고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아지셔서 부부가 함께 퇴소를 하셨습니다. 어르신들과 정이 많이 들었었지만 이때가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문제점과, 애로사항 있다면 소개를 해 달라? 요양보호사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직업입니다. 요양보호사들은 어르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우대하기 위해 힘쓰지만, 어르신이나 보호자들은 요양보호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은 아줌마라고 부르며 인격을 무시하고 사기를 격하시키며 자신들만이 만족 할 수 있는 시중과 서비스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인식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양보호사들도 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고 더 나아가 다른 어르신에게 피해가 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호간에 인격 존중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요양원에 대한 인식제고와 근본대책을 제시한다면?과거에 몇몇 안 좋은 요양기관들이 TV에 방영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양원이란 곳은 비인격적이며 문제와 비리가 많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관할 시·구청·보건복지부 국민보험공단에서 요양원에 대해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관에서는 지속적인 내부 교육을 통해 종사자의 전문성을 강화시키고 어르신들에게 최상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회의와 고민을 끊임없이 하며 실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많은 요양원이 투명성 있고 바른 운영을 하며 인식 제고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에 대한 색안경을 벗어주시고 열린 마음으로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흙과불 도공의 혼 삼위일체 도자기 예술품
    로원도예 권태영 작가의 투각 청자 도자기에 혼을 넣는다. 이천을 대표로 하는 원적산 줄기에 이어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원적로 133번길115에 위치한 로원도예(度希 권태영)가 조그마한 안내 간판만 우뚝 서 있는 가운데 예술감각이 숨쉬고 있는 로원도예 공방이 차지하고 있다. 도예공방에 들어서는 순간 벽에 걸려있는 낯익은 듯 한 외국인이 투각청자를 한국인에게 받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은 다름 아닌 미국 카터 대통령과 연세중앙교회 윤석전담임목사님이 나란히 서있고 그 아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청자 작품에 무언가의 글씨와 함께 자리매김 하고 있는 우화하고 청빈한 자태의 예술작품은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대통령에게 목사님이 전달한 로원도예 度希 권태영선생 작품이다.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과의 만남 도희(度希)권대영 선생은 약 10여년전에 한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서성이다 공방으로 들어서면서 당시 전시장에 전시중인 청자 한 점을 가르치면서 가격을 물어와 100만원이라고 말하자 10점이 필요하니 가격을 싸게 해 달라고 요구해 1점당 10만씩을 깍아주겠다고 하니까 제작기간을 6개월로 하고 빳빳한 수표 2장을 계약금으로 내놓고 돌아가 반신반의 끝에 6개월의 납품기간을 약속하고 제작 작업에 돌입하였다. ▣청자투각작품이 마침내 백악관과 청와대에 입성하다. 하지만 뒤이어 도자기에 들어갈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어 자칫 실수를 우려 곧바로 전사업체에 의뢰하여 영문도 모르고 작품 활동에 심혈을 다해 제작 납품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뒤늦게 알게된 사실은 미국 백악관에 카터 대통령외 유명인사들에게 자신의 제품이 선물로 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를 계기로 인연이 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청와대 이명박대통령 재임시절에 청자작품이 납품하였고 뒤 이에 박근혜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청자작품을 선물용으로 3점을 완성 2점을 전달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나머지 1점은 가보로 소장하고 있으며 항상 목사님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힌다. 박근혜대통령소장 도자기문구는 “선진들의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 배경 삼으시고 솔로몬의 큰 지혜로 국민통합이루시고 무궁화 꽃 활짝핀 통일나라이루소서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연세중앙교회 담임목사 윤석전” ▣흙이 좋고 먹고 살기위한 작품 활동이 도자기 예술로 승화 度希권대영선생은 일찍이 도자기의 마을인 신둔면 남정리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부터 늘 가깝게 할 수 있는 흙으로 인해 흙과 친해졌고 이어서 먹고 살기위해 흙을 이용한 도자기 작품에 심취하여 무작정 도자기업종에 젊음을 받치며 나름대로 자신만이 독특한 작품을 예술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연구 개발에 몰두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도자기는 오묘한 흙과 불 도공의 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비의 세계 도자기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도공의 피나는 노력과 예술성 감각과 정성을 다한 혼을 작품에 불어 넣을 때만이 흙과 불의 오묘한 조화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도자기의 작품이 탄생한다는 신념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상업욕심에 의해 대량생산으로 작품을 생각한다면 이는 예술품이 아닌 단지 상품의 역할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항상 도자기 작업을 하기위한 마음가짐 을 위해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해 순수한 자연의 섭리와 함께 최선을 다한 정성으로 내 자신이 예술품에 살아있는 혼을 불어 넣는다는 신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자기는 양질의 재료와 함께 좋은 형태를 만드는 성형이 중요합니다. 형태가 나와야 형태에 따라 무슨 문양과 음각 양각을 넣을 것인가 결정이 되며 아울러 청자의 멋은 색 형태 조각으로 비취색이라 하는 신비스러운 색에서 우러나는 품위와 형태의 오명한 각선미가튼 신비함과 오묘함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상감청자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작품의 고급화를 위해 이중투각 작품에 심취하여 짧게는 한 점에 1주일 길게는 2개월에서 3-4개월 걸리는 작품도 있고 좀 더 특색 있는 작품을 하려하면 재료를 제때 구하지 못해 6개월 1년을 걸리는 경우도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귀 뜸 한다. ▣비로소 도자기 도공으로 인정받다. 어린시절부터 흙을 좋아했고 더불어 생활을 하다보니 도자기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80년도에 토정 홍재표선생님께 물레수업을 사사받았고 형태와 선에 대해 국민대 김익영교수님 지도아래 배웠고 유약은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를 수료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1980년도 도예입문하여 1988년제10회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출품 1989년롯데백화점3회개인전 1990년동경전시회 1993년 전국민예품전시회출품 1995년10월 마침내 로원요를 설립하여 2015년2월26일 한국예술문화 전통도예투각명인으로 한국예총명인협회로 부터 인증을 받았다. 2008년12월25일부터 29일 일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전시 2009년 5월17일 제10회 클레이올림픽입선 9월23일부터28일 인사동서울미술관 전시전 12월 대한민국녹청자 현대도예 공모전입선 제14회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입선 2010년 제15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1년제3회목포 도자기전국공모전 특선 2012년제17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3년 4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서울경인미술관전시 2013년 제5회목포도자기전국대전 입선 2014년5월 제2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대상 제3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특별상2015년4월경기도기능경기대회은메달을 획득하였다./강민선기자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 수상 도예인 자긍심과 2013/05/13 18:06 입력도천 서광윤 '서광윤요'대표 활활 타오르는 진홍빛의 강렬한 불꽃! 그 엄청난 온도 속에서 오늘도 한국 전통자기의 탄생을 알리는 생명의 소리가 도공의 인고의 열정과 함께 고고한 자태로 익어가며 서광윤 도예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이처럼 그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은 흙에서 도예가의 예술혼과 함께 결을 따라 빚어져 자기로 재탄생 되며, 15세 소년 서광윤 그의 가슴도 뜨겁게 매료시켜 지금의 도예가로 탄생시켰다.1970년 25세의 나이로 지순택요에 입문하여 10여 년 간의 배움의 열정으로 도림서원 성형장으로 6년, 신정희요 성형장으로 10년간의 도예인 으로서 입지를 다지며 1996년 지금의 이천시 신둔면 마교리에 위치한 서광윤요를 설립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한국 전통 도자의 숭고한 맥을 이어오고 있다.한 덩이의 흙은 서 대표의 손길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고 성난 파도와 같이 한 획을 이루는가 하면 때로는 잔잔한 호수와 같이 고요히 흐르며, 그의 매만짐 속에 절제와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도자로 피어나 솔 향을 머금을 장작가마 속 불꽃을 통해 영롱한 백자로, 한 점 한 점 차별화된 무늬의 매력을 지닌 진사로, 소박해보이지만 정갈하고 절제미가 있는 분청으로 물레질부터 성형, 조각, 유약 바르기, 장작가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옛 전통방식으로 제작하고 잇다.특히 전통 장작가마 방식은 소나무 장작으로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가마에 불을 지펴 1300도가 넘는 고온으로 한국도자의 견고함과 장인의 고집으로 더욱 차별화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도자를 제작하는데 핵심적이다. 겉모습을 비슷하게 모방 할 수 있겠지만, 장인의 손에서 더해지는 변치 않는 도자의 가치는 시중에 유통되는 일부 도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을 이어가는 서 대표 만의 예술혼이 서려 있다.옛 전통을 이어감에 있어서 “요즘은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지만, 대중의 관심은 생활자기를 비롯한 호기심에 그치고 있지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람은 없다.” 라는 서 대표의 말속에 대중들은 며칠간 이뤄지는 축제의 퍼포먼스 처럼 여겨 소중한 우리 전통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한편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서 대표는 전통을 지키면서 도자의 가치를 알리고자 더욱 다양한 작품활동과 대중과의 소통으로 연구 노력하는 가운데 지난 29일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한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전통 도예발전 공로에 있어서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과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을 수상해 도예인으로서 자긍심과 위상을 드 높였다.또한, 일본 후쿠오카시 엘라홀 갤러리전과 장애인돕기 대구문화예술회관전, 장애우권익보호기금마련을 위한 도예장인전등 나눔을 통한 그의 행보는 도예발전에 기여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앞으로도 서 대표는 아내, 자녀와 함께 꾸려가는 서광윤요를 “힘든 와중에도 조용히 도움을 주는 터전으로, 실력과 자부심을 가진 전통도예의 뿌리깊은 계승자로, 나아가 세계인의 중심에 선 도예장인으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 전하며 “조금더 밝아질 도자미래는 애호가 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도자미래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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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학진 여주군의회 부의장(민주당가선거구 여주 북내 강천 기초의원)
    농민단체 수매가 7만원요구 절대 과한 것 아니다 군민 모두 질 높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노력 기초의회 의원은 군민을 대변해서 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협조자로서 함께하는 동반자 역할을 하여야 하며 군민을 대표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자치단체의 법률인 조례를 제정 및 개정해서 군민의 삶의 질이 향상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주는 희망의 농촌공동체를 건설해야 합니다. 동네 못자리를 모두 모여서 함께하고 마을의 독거노인들이 모여서 공동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농사철에는 일손을 돕기 위해, 겨울에는 마을회관 공동급식 사업에 대한 지원 등 노인네들이 먹을 걱정, 추위 걱정 없는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복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의 젊은이들이 뜻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2008년산 여주지역 농협 수매가가 6만8천원 이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시중에 쌀이 남아돈다고 매년 8천원씩 농협 수매가가 떨어져 우리 농민들을 울렸습니다. 작년도 1년 흉작으로 정부 재고미가 160만톤에서 84만톤으로 70~80만톤이나 줄어들었고, 올해 예상 벼 생산량이 정부 발표에 의하면 420만톤으로 엄청난 흉작이었던 작년도 429만5천톤보다도 9만5천톤이나 줄어든 상황입니다. 2008년도 가격이 6만 8천원 이었습니다. 7만원 요구가 절대 과한 것입니까?! 2011년산 농협 수매가를 제현율 80% 기준 으로 농민단체에서 요구하는 7만원으로 결정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 합니다. 본격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이후 민선군수가 주민들의 선출에 의해 탄생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군민들의 행정감시자와 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의회에 관심을 가져 잘한 부분에 대해선 찬사와 성원을 보내주시고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질타와 꾸지람으로 진정한 취지를 살려 군민 모두 질 높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군민 모두 의사와 여론이 행정에 반영 되어 살기 좋은 여주군을 만드는데 동참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군민들의 관심이 많으면 많은 만큼 여주군이 발전 합니다. 모든 일에 성실하고 주워진 여건에 만족하며 더불어 생활 하자를 생활신조로 하면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재능유치원 원장이며 동갑내기인 나의 사랑하는 반려자 이순자와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모두 출가시켜 현재는 평생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 둘이지내고 있으며,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가족과 이웃이 되는 것이 생활신조라 할까요? <관련기사4면계속>
    • 초대석
    2011-10-18
  • 모기없는 이천을 만든 '이천시 보건소'
    필자는 설봉산 야간등반을 매일저녁 즐긴다. 중간지점에 오르면 칼바위가 나오고 칼바위 벤치에서 보는 이천 야경은 정말 황홀하다. 남들은 1시간 거리를 2시간에 걸쳐 천천히 라디오를 들으며 칼바위 벤치에 누워 2-30분을 별과 야경을 감상하기도 한다.마침 뉴스시간이 되어 (9월 22일 SBS) 8시 뉴스를 듣게 되었다.“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올해 모기는 처서가 지난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입이 멀쩡한 건 물론이고 아주 기세가 등등합니다.000기자가 이유를 알아봤습니다.입구에 모기향을 피워보고 약을 쳐봐도 모기는 뾰족한 주둥이를 내밀고 벽에 달라붙어 꼼짝도 않습니다.(000/직장인 : 하루에 열 번 정도는 물리는 것 같아요.)가정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얼마나 모기에 시달렸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입니다.이미 여름은 다지나갔는데 아직도 왜 이렇게 모기가 많은 걸까요?모기가 사라져야할 8월말 9월초 늦더위가 몰려오면서 개체수가 오히려 늘어났고 날이 선선해지자 모기들이 실내로 모여든 겁니다. 보건소의 경우 하루 평균 5건 이상의 방역 요청이 들어옵니다. “ 9월말 경에도 2-3차례나 이런 뉴스를 들었다. 그것도 모기들의 활동이 왕성한 저녁시간대에 설봉산에 편히 누워서……. 왜 이산에 모기가 없을까? 올 들어 매일 저녁 산행을 했는데 한 번도 모기에 물린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다음날 꿈에그린 김치 한상화사장과 시내 새 소망사 세탁소 유화열 사장님 등 몇 사람에게 물었다. “아직도 모르세요. 공무원들이 오래전부터 모기와 전쟁을 벌여서 모기가 씨가 말랐어요.” “맞아요! 나는 6년 전에 들었어요. 모기 알 서식지를 찾아 없앤다던가...”사실이라면 시민들에게 크게 칭찬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모기약 판매가 절반으로 줄었어요.”-종근당 영업사원얼마 전에 열린 설봉산 별빛축제(2011.7월9일-8.27일, 매 공연 시마다3000명 참여))에 참석했던 학생을 만나봤다. “모기요? 올해 장마에 다 떠내려 간 것 같은데요. 물린 적 없어요. 왜 없는지는 저도 모르죠”송정동 산속 깊은 곳, 번심사 절 앞에 있는 주민(송정동350-7, 오종근씨.76)을 만나봤다. “옛날엔 모기 말도 못하게 많아서 마당에 잠시 나오려면 양쪽 귀에 모기향을 꽂고 나와야 했지요. 그래도 엄청 물렸는데...올해는 집 마당에 나와 고기를 구워먹기도 해요. 이 근처 웅덩이에 방역직원이 와서 유충을 싹 죽이고 난 덕분인 것 같아요. 우리 집 옆 고무다라에 고인 물까지 비우고 갈 정도로 철저하게 신경을 써주더군요.” 그렇다면 모기약도 줄지 않았을까 싶어 조사해보았다.이천버스터미널 앞 우리들 약국을 경영하는 이희상(이천시 약사회장)약사는 “올해 모기약의 판매량이 현격히 감소했다. 거의 팔리지 않는다.”종근당 제품 이천, 여주, 광주지역 담당 영업사원 이정욱씨는 “모기약 판매추이를 볼 때 올해 여주와 광주는 전년대비 비슷한 매출을 보인 반면 이천은 절반으로 줄었다.” 고 하였다. 한편, 이천시 모기관련 방역민원도 지난해 9월 41건에서 올 9월 16건으로 전년대비61%가 줄었다. 그나마 민원 중에는 타지에서 이사 와서(모기에 물려서가 아니라) “한 번도 연기 뿜는 방역모습을 못 봤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한분들도 있었다.“공무원들의 ‘사계절 방역’이 일등공신” 방역 책임을 맡고 있는 이천시 심평수 보건소장을 만나보았다.“이천에 모기가 안 보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려 달라.”“99년부터 실시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사계절 방역“의 결과다.당시 보건소 직원이었던 김재찬씨가 모기를 근본적으로 박멸할 유충구제에 관한 지식과 의지를 갖고 있기에 보건소장으로 취임하던 99년도부터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얼마 후 김 씨가 사직을 한 후 재래식 소독방법을 고집하던 직원들로 인해 2년간 유충소독이 중단되기도 했었다.그 후 유충소독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직원을 발굴했는데 그가 박태구(현 상하수도 사업소 근무)씨다. 현재 방역 시스템의 골격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제공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구체화한 사람은 박태구씨다. 3년간의 고생 끝에 확인된 친환경 방역 시스템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 후 조용범씨가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보완을 하여 현 최첨단 친환경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였다.저도 당시 방역계획안에 확신을 가져 아주대 의용곤충학과 유호석교수에게 검토, 보완요청을 한바, “어떻게 공무원들이 이런 전문적 계획서를 준비했느냐”고 놀라워하며 당시 부교수였던 양영철교수에게 “양 교수가 전담해서 이 계획이 성과를 거두도록 지원하라”며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당시 安을 검토한 경기도 담당과장도 ‘획기적인 안이다. 경기도 전 지역 방역담당들을 모아 브리핑을 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체적으로, 지역적으로 강연한 적이 있다.당시에 최초 기획을 했던 김재찬 씨를 부발 에서 만났다.“당시는 전국적으로 차량 연막소독만 하던 시기였다. 다행히 전공이 보건 위생분야라서 연막소독은 경유 소모가 많아 비용이 많이 들고, 밀폐된 지역이 아니면 효과가 미미하다. 형식적인 방역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내가 생각하는 방역계획서를 준비하여 보고 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이었는데 적극 지지해주신 시장님, 보건소장님, 장정례 팀장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250개 보건소 중 2위, 과학적인 이천시 방역소독방법” 김재찬씨 사직 후 정체되었던 모기방역은 보건소장이 보기 드물게 성실한(보건소장 표현) 박태구씨를 발굴해 방역일을 맡기면서 무섭게 탄력을 받아 ‘과학적인 방역소독 방안’을 완성시키게 된다. (부발 상수도 사업소 수도과에 근무하는 박태구씨를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예를 들면 이장들의 협조를 받아 ‘유충서식지 지도’를 완성, 소독을 하고, 유사한 두 지역을 선정해, 소독을 한 지역, 안한 지역에 유문등(모기 채집기)을 설치, 두지역의 모기채집량을 검사하는 ‘이중 맹검법’을 개발하여 당시 확신뿐이었던 모기제거 방법을 과학적으로 검증해 나갔다“당시엔 채집된 벌레들 중에서 모기를 골라내는 것도 어려웠다. 나중에 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우리방안을 알고 감탄하면서 적극 도와주었다.2005년 FMTP(전염병관리자 교육)대회에서 250보건소중 2위를 했다. 심사위원 중 한분인 아주대교수는 ‘내용상 이천이 1위인데 불공정한 심사로 1.2위가 바뀌었다.’라고 항의 하며 시상식에 불참하기도 하였다. 보고서 내용 중 모기방역방법은 전국에서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안이라고 교수들은 인정하였다. 또한 이천시 보고서가 대학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연구인 것을 알고 놀라워 하였다. ““용인,천안,평택,양평,충주,공주,김제,문경 등 많은 지역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하고 전화문의도 많았다. 열심히 자료도 보내고 안내해줘도 우리처럼 실시하는 지자체는 못 봤다.”-배워가서 실시를 못하는 이유는?“담당자의 의도가 좋아도 부서장, 지자체장을 설득해 방역 차량과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시처럼 분무소독 특장차 4대, 유충소독 특장차 1대를 구비, 기계화 시스템을 갖추고 연막소독을 완전히 중단한 지자체는 없다. 방역방법도 종전 읍, 면, 동 단위 기사들의 살포 방식을 개선해 전문지식을 갖춘 용역회사에 방역을 맡겨 효율적인 방역을 하게 된 점 등 시장님과 보건소장님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인터뷰 후 수도과 남오철 과장은 ‘박태구팀장은 수도과에서도 수질개선 등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늘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는 정말 성실한분’이라고 격찬을 했다.) 현 방역 담당 조용범씨를 만났다.“현재의 성과에 만족하면 큰일 난다. 거의 없어진 모기라도 번식력이 뛰어나기에‘ 1년 내내 유충과 성춘 서식지를 계속 찾아내 방역해야 한다. 우리는 시장님과 소장님의 일관된 방침에 따라 2001년부터 연막소독을 줄이고 유충 방역을 병행해왔고 2007년도에 연막소독을 폐지하고 유충방역과 더불어 물을 이용한 친환경 분무소독으로 전환했다. 유류비, 인건비 등 상당한 예산절감효과도 있었다. 연막소독은 약제를 섞은 경유를 불완전 연소시켜 살포하는 것으로 예산이 낭비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체에 유해하며, 효과는 미미하다.그러나 연막소독을 안하면 민원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 지자체들이 연막소독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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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18
  • 모기없는 이천을 만든 '이천시 보건소'
    필자는 설봉산 야간등반을 매일저녁 즐긴다. 중간지점에 오르면 칼바위가 나오고 칼바위 벤치에서 보는 이천 야경은 정말 황홀하다. 남들은 1시간 거리를 2시간에 걸쳐 천천히 라디오를 들으며 칼바위 벤치에 누워 2-30분을 별과 야경을 감상하기도 한다.마침 뉴스시간이 되어 (9월 22일 SBS) 8시 뉴스를 듣게 되었다.“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올해 모기는 처서가 지난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입이 멀쩡한 건 물론이고 아주 기세가 등등합니다.000기자가 이유를 알아봤습니다.입구에 모기향을 피워보고 약을 쳐봐도 모기는 뾰족한 주둥이를 내밀고 벽에 달라붙어 꼼짝도 않습니다.(000/직장인 : 하루에 열 번 정도는 물리는 것 같아요.)가정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얼마나 모기에 시달렸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입니다.이미 여름은 다지나갔는데 아직도 왜 이렇게 모기가 많은 걸까요?모기가 사라져야할 8월말 9월초 늦더위가 몰려오면서 개체수가 오히려 늘어났고 날이 선선해지자 모기들이 실내로 모여든 겁니다. 보건소의 경우 하루 평균 5건 이상의 방역 요청이 들어옵니다. “ 9월말 경에도 2-3차례나 이런 뉴스를 들었다. 그것도 모기들의 활동이 왕성한 저녁시간대에 설봉산에 편히 누워서……. 왜 이산에 모기가 없을까? 올 들어 매일 저녁 산행을 했는데 한 번도 모기에 물린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다음날 꿈에그린 김치 한상화사장과 시내 새 소망사 세탁소 유화열 사장님 등 몇 사람에게 물었다. “아직도 모르세요. 공무원들이 오래전부터 모기와 전쟁을 벌여서 모기가 씨가 말랐어요.” “맞아요! 나는 6년 전에 들었어요. 모기 알 서식지를 찾아 없앤다던가...”사실이라면 시민들에게 크게 칭찬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모기약 판매가 절반으로 줄었어요.”-종근당 영업사원얼마 전에 열린 설봉산 별빛축제(2011.7월9일-8.27일, 매 공연 시마다3000명 참여))에 참석했던 학생을 만나봤다. “모기요? 올해 장마에 다 떠내려 간 것 같은데요. 물린 적 없어요. 왜 없는지는 저도 모르죠”송정동 산속 깊은 곳, 번심사 절 앞에 있는 주민(송정동350-7, 오종근씨.76)을 만나봤다. “옛날엔 모기 말도 못하게 많아서 마당에 잠시 나오려면 양쪽 귀에 모기향을 꽂고 나와야 했지요. 그래도 엄청 물렸는데...올해는 집 마당에 나와 고기를 구워먹기도 해요. 이 근처 웅덩이에 방역직원이 와서 유충을 싹 죽이고 난 덕분인 것 같아요. 우리 집 옆 고무다라에 고인 물까지 비우고 갈 정도로 철저하게 신경을 써주더군요.” 그렇다면 모기약도 줄지 않았을까 싶어 조사해보았다.이천버스터미널 앞 우리들 약국을 경영하는 이희상(이천시 약사회장)약사는 “올해 모기약의 판매량이 현격히 감소했다. 거의 팔리지 않는다.”종근당 제품 이천, 여주, 광주지역 담당 영업사원 이정욱씨는 “모기약 판매추이를 볼 때 올해 여주와 광주는 전년대비 비슷한 매출을 보인 반면 이천은 절반으로 줄었다.” 고 하였다. 한편, 이천시 모기관련 방역민원도 지난해 9월 41건에서 올 9월 16건으로 전년대비61%가 줄었다. 그나마 민원 중에는 타지에서 이사 와서(모기에 물려서가 아니라) “한 번도 연기 뿜는 방역모습을 못 봤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한분들도 있었다.“공무원들의 ‘사계절 방역’이 일등공신” 방역 책임을 맡고 있는 이천시 심평수 보건소장을 만나보았다.“이천에 모기가 안 보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려 달라.”“99년부터 실시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사계절 방역“의 결과다.당시 보건소 직원이었던 김재찬씨가 모기를 근본적으로 박멸할 유충구제에 관한 지식과 의지를 갖고 있기에 보건소장으로 취임하던 99년도부터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얼마 후 김 씨가 사직을 한 후 재래식 소독방법을 고집하던 직원들로 인해 2년간 유충소독이 중단되기도 했었다.그 후 유충소독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직원을 발굴했는데 그가 박태구(현 상하수도 사업소 근무)씨다. 현재 방역 시스템의 골격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제공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구체화한 사람은 박태구씨다. 3년간의 고생 끝에 확인된 친환경 방역 시스템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 후 조용범씨가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보완을 하여 현 최첨단 친환경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였다.저도 당시 방역계획안에 확신을 가져 아주대 의용곤충학과 유호석교수에게 검토, 보완요청을 한바, “어떻게 공무원들이 이런 전문적 계획서를 준비했느냐”고 놀라워하며 당시 부교수였던 양영철교수에게 “양 교수가 전담해서 이 계획이 성과를 거두도록 지원하라”며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당시 安을 검토한 경기도 담당과장도 ‘획기적인 안이다. 경기도 전 지역 방역담당들을 모아 브리핑을 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체적으로, 지역적으로 강연한 적이 있다.당시에 최초 기획을 했던 김재찬 씨를 부발 에서 만났다.“당시는 전국적으로 차량 연막소독만 하던 시기였다. 다행히 전공이 보건 위생분야라서 연막소독은 경유 소모가 많아 비용이 많이 들고, 밀폐된 지역이 아니면 효과가 미미하다. 형식적인 방역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내가 생각하는 방역계획서를 준비하여 보고 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안이었는데 적극 지지해주신 시장님, 보건소장님, 장정례 팀장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250개 보건소 중 2위, 과학적인 이천시 방역소독방법” 김재찬씨 사직 후 정체되었던 모기방역은 보건소장이 보기 드물게 성실한(보건소장 표현) 박태구씨를 발굴해 방역일을 맡기면서 무섭게 탄력을 받아 ‘과학적인 방역소독 방안’을 완성시키게 된다. (부발 상수도 사업소 수도과에 근무하는 박태구씨를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예를 들면 이장들의 협조를 받아 ‘유충서식지 지도’를 완성, 소독을 하고, 유사한 두 지역을 선정해, 소독을 한 지역, 안한 지역에 유문등(모기 채집기)을 설치, 두지역의 모기채집량을 검사하는 ‘이중 맹검법’을 개발하여 당시 확신뿐이었던 모기제거 방법을 과학적으로 검증해 나갔다“당시엔 채집된 벌레들 중에서 모기를 골라내는 것도 어려웠다. 나중에 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우리방안을 알고 감탄하면서 적극 도와주었다.2005년 FMTP(전염병관리자 교육)대회에서 250보건소중 2위를 했다. 심사위원 중 한분인 아주대교수는 ‘내용상 이천이 1위인데 불공정한 심사로 1.2위가 바뀌었다.’라고 항의 하며 시상식에 불참하기도 하였다. 보고서 내용 중 모기방역방법은 전국에서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안이라고 교수들은 인정하였다. 또한 이천시 보고서가 대학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연구인 것을 알고 놀라워 하였다. ““용인,천안,평택,양평,충주,공주,김제,문경 등 많은 지역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하고 전화문의도 많았다. 열심히 자료도 보내고 안내해줘도 우리처럼 실시하는 지자체는 못 봤다.”-배워가서 실시를 못하는 이유는?“담당자의 의도가 좋아도 부서장, 지자체장을 설득해 방역 차량과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시처럼 분무소독 특장차 4대, 유충소독 특장차 1대를 구비, 기계화 시스템을 갖추고 연막소독을 완전히 중단한 지자체는 없다. 방역방법도 종전 읍, 면, 동 단위 기사들의 살포 방식을 개선해 전문지식을 갖춘 용역회사에 방역을 맡겨 효율적인 방역을 하게 된 점 등 시장님과 보건소장님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인터뷰 후 수도과 남오철 과장은 ‘박태구팀장은 수도과에서도 수질개선 등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늘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는 정말 성실한분’이라고 격찬을 했다.) 현 방역 담당 조용범씨를 만났다.“현재의 성과에 만족하면 큰일 난다. 거의 없어진 모기라도 번식력이 뛰어나기에‘ 1년 내내 유충과 성춘 서식지를 계속 찾아내 방역해야 한다. 우리는 시장님과 소장님의 일관된 방침에 따라 2001년부터 연막소독을 줄이고 유충 방역을 병행해왔고 2007년도에 연막소독을 폐지하고 유충방역과 더불어 물을 이용한 친환경 분무소독으로 전환했다. 유류비, 인건비 등 상당한 예산절감효과도 있었다. 연막소독은 약제를 섞은 경유를 불완전 연소시켜 살포하는 것으로 예산이 낭비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체에 유해하며, 효과는 미미하다.그러나 연막소독을 안하면 민원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 지자체들이 연막소독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 초대석
    2011-10-18
  • 이계찬 주필이 만나는 향기 나는 사람 33
    밥해주는 아줌마, 작은 평화의집 장은경 원장21년간 6명의 자녀들을 가슴에 묻고 ‘발가락 끝까지 눈물을 짜낸 장애아 들의 엄마’ 오래전부터 만나고픈 사람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녀의 향기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모처럼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다. “너무 주변에서 아름답게 알려진 분이라 취재하기에 힘이 듭니다. 훌륭한 삶을 잘 묘사 못할까봐…….”“저 그렇게 훌륭한 사람 아니에요.(웃음) 원하시면 내일 10시에 오세요.11시엔 밥해야 하니까…….”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녀는 밝고, 착한 그리고 순수한 소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여서 마음이 편해졌다.50m쯤 되보이는 긴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입구 우측에는 화초가 심어진 고장 난 양변기가 수m간격으로 놓여 있었다.(가장 천한 물건이 작은 평화의 집에 오니 가장 아름다운 화분으로 변했다.) 자그마한 기와집 안에 들어서니 원생들이 TV를 보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필자가 인사를 하니 모두 반갑게 인사들을 했다. 그 사이로 부엌에서 일을 하던 장 원장이 휠체어를 타고 환히 웃으며 마중 나왔다.거실에 소파가 없어 주방 식탁에 않아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요한 형제(총무)가 옆에서 조용히 음료와 과일을 깎아주고 밖으로 일하러 나갔다. 마치 고요한 숲속 호숫가에 앉은 소녀가 이야기 하듯, 그녀는 잔잔히 필자의 질문에 답변을 이어 나갔다.“저는 장호원 진암에서 자랐어요. 아버님은 선반기술자 이셨는데 사재를 털어 장호원 기술학교(현 부원고)를 세우셨죠. 1남 4녀중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소아마비가 왔죠.”그녀는 소아마비로 절망의 나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5학년 즈음 아버지가 세우신 학교의 교장으로 오신 분이 “한번 은경이를 세브란스에서 치료해봅시다.”라고 했다 그 당시는 소아마비 치료기술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부친이 고교를 설립하느라 사재를 모두 기증하는 바람에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교장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장의 양아들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무료치료가 가능했다. 당시에는 소아마비를 수술할 능력을 가진 의사가 한명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세브란스 의사 중에 외국에서 신 수술법을 익혀 갓 돌아온 국내 최고의 의사가 있었다. 은경 씨는 그 의사의 첫 번째 시술자였다. 일종의 실험대상이기도 했다. “예수님 닮았네, 뭐긴 뭐야 면류관이지! ‘ 머리를 고정하는 원형으로 된 차가운 쇠틀이 은경씨 머리에 씌워졌다. 옆에 다른 환자가 중얼거렸다.“예수님 같구먼…….” 의대생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을 했다. 한마디씩 질문을 던졌다.“교수님 저 환자 머리에 씌운 게 뭡니까?”“뭐긴 뭐야 면류관이지!” 초등학교 5 학년생인 은경 씨는 나이에 비해 철이 일찍 들었었다. 그들의 말에 상처를 받기보다는 왜 예수님 같다고 하는지 성경을 펼쳐 읽어 보았다.그리고 예수님이 죄도 없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쏟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병을 고치려고 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도 없이 나보다 더 고통을 당하셨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쇠를 박는 수술이 이어졌다. 수술 전에 마취에 들어갔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김남현이라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 대단한 의사가 마취를 하며 은경 씨가 평안히 마취가 되도록 직접 찬송가를 불러줬다.수술 중 과다출혈이 되었다. 긴급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병원에 준비된 피로는 역부족이었다. 병원 내 긴급 수혈요청 방송이 됐다. 의대생들이 뛰어와 수혈을 해 위기를 넘겼다.수술 후 통증을 한 달이나 이어졌다. 어느 날은 진료온 김남현의사가 은경씨를 위로하며 이야기 했다. “은경아! 네 수술 과정이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던 과정과 똑 같구나. 머리에 면류관이며 옆구리에 구멍 난 것, 피를 다 쏟았던 것…….그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너도 병을 이기고 일어날 거야…….” 그 고맙고 친절했던 의사는 지금 은퇴 후 옥한음 목사가 시무하던 사랑의 교회 장로로 봉사하며 계시다. 병원에서 자신보다 더 중환자들이 많음을 보았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올케가 꿈 이야기를 했다. 많은 적들에게 쫓기다가 강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너는 능히 건널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은경 씨는 그 꿈이 자신에 관한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남을 도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집에서 간간히 남에게 피아노 지도를 하던 그녀는, 20세쯤 되어 작은 레코드, 선물가게를 열었다. 스스로 벌어 남을 돌 볼 생각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1500만원의 대출을 일으켜 어려운 계층들이 모여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만들었다.처음에는 중간계층의 장애인들이 서로 모여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장애인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그녀 뜻과는 다르게 수시로 장애자녀들을 데려와 몰래 버리고 갔다.그렇게 가족이 형성되었다.혼자서 힘이 들어 못견뎌할 즈음, 최요한 형제가 들어왔다. 당시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의 치유 불가한 저혈압, 심각한 심장박동, 구토…….갖은 질병을 앓고 있던 그는 꿈꾸던 신학을 포기하고, 은경 씨의 손과 발이 되어 장애우들을 섬겨주었다.(이제는 치유되었다.)“10년간 6명의 자녀를 가슴에 묻고 눈물짓는 한국의 ‘테레사’그녀는 91년부터 2009년까지, 자신의 가슴으로 낳아 기르던 6명의 자녀를 떠나보냈다. 많은 질병으로 시달리는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다 보면, 좀 무뎌지기도 하련만은…….하는 생각은 가슴이 메마른 내 생각이었다. 장 원장은 그들을 모두 가슴에 묻었다.보낸 아이들 이야기 할 때, 그녀의 잔잔하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장남 덕우와의 이별을 이렇게 표현했다.“맑고 의젓하고 삶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했던 머스마,/ ...때론 분노하고 가슴을 치기도 했던 나의 몸짓이 / 유독 네 앞에 서면 잔잔해지곤 했었지. /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 장남! / 울 엄마도 울 언니도 장남은 어려워하더라. / 나도 네가 듬직해서 어려워 했었나보다. /...그렇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너를 보내야 했던 날. / 뽀개지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 너의 눈을 감기고……./ 싸늘한 영안실로 너를 보내놓고 / ...얼마나 발가락 끝까지 고인 눈물을 짜냈는지./ 또 얼마나 오래 수저 드는 일을 힘들어 했는지...-‘나의 장남 덕우야.’ 중또 영진 이를 보내고 펜을 들었다. “한없이 맑았던 아이,/ 노래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삼촌을 너무도 사랑했던 /우리 영진 이는 단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한 몸 그대로 / 세상과 이별하려 한다.언제나 그래왔지만 손을 놓지 못하겠다고 주님께 매달렸었다. / 제발 내 목숨 반절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 애원도 했었다.../ 인간적인 미련과 나의 욕심은 / 내 설움에 겨워 발작을 해 댄다.― “사랑한다, 영진아! ‘ 중그녀는 이제 남은 16명의 자녀들에게 더 맛난 음식을 해주고파서 한식 조리사 자격을 땄다.“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편히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이야기 하는 그녀를 보며 ‘사랑에도 욕심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초대석
    2011-09-29
  • 이계찬 주필이 만나는 향기 나는 사람 33
    밥해주는 아줌마, 작은 평화의집 장은경 원장21년간 6명의 자녀들을 가슴에 묻고 ‘발가락 끝까지 눈물을 짜낸 장애아 들의 엄마’ 오래전부터 만나고픈 사람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녀의 향기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모처럼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다. “너무 주변에서 아름답게 알려진 분이라 취재하기에 힘이 듭니다. 훌륭한 삶을 잘 묘사 못할까봐…….”“저 그렇게 훌륭한 사람 아니에요.(웃음) 원하시면 내일 10시에 오세요.11시엔 밥해야 하니까…….”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그녀는 밝고, 착한 그리고 순수한 소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여서 마음이 편해졌다.50m쯤 되보이는 긴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입구 우측에는 화초가 심어진 고장 난 양변기가 수m간격으로 놓여 있었다.(가장 천한 물건이 작은 평화의 집에 오니 가장 아름다운 화분으로 변했다.) 자그마한 기와집 안에 들어서니 원생들이 TV를 보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필자가 인사를 하니 모두 반갑게 인사들을 했다. 그 사이로 부엌에서 일을 하던 장 원장이 휠체어를 타고 환히 웃으며 마중 나왔다.거실에 소파가 없어 주방 식탁에 않아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요한 형제(총무)가 옆에서 조용히 음료와 과일을 깎아주고 밖으로 일하러 나갔다. 마치 고요한 숲속 호숫가에 앉은 소녀가 이야기 하듯, 그녀는 잔잔히 필자의 질문에 답변을 이어 나갔다.“저는 장호원 진암에서 자랐어요. 아버님은 선반기술자 이셨는데 사재를 털어 장호원 기술학교(현 부원고)를 세우셨죠. 1남 4녀중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소아마비가 왔죠.”그녀는 소아마비로 절망의 나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5학년 즈음 아버지가 세우신 학교의 교장으로 오신 분이 “한번 은경이를 세브란스에서 치료해봅시다.”라고 했다 그 당시는 소아마비 치료기술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부친이 고교를 설립하느라 사재를 모두 기증하는 바람에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교장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장의 양아들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무료치료가 가능했다. 당시에는 소아마비를 수술할 능력을 가진 의사가 한명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세브란스 의사 중에 외국에서 신 수술법을 익혀 갓 돌아온 국내 최고의 의사가 있었다. 은경 씨는 그 의사의 첫 번째 시술자였다. 일종의 실험대상이기도 했다. “예수님 닮았네, 뭐긴 뭐야 면류관이지! ‘ 머리를 고정하는 원형으로 된 차가운 쇠틀이 은경씨 머리에 씌워졌다. 옆에 다른 환자가 중얼거렸다.“예수님 같구먼…….” 의대생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을 했다. 한마디씩 질문을 던졌다.“교수님 저 환자 머리에 씌운 게 뭡니까?”“뭐긴 뭐야 면류관이지!” 초등학교 5 학년생인 은경 씨는 나이에 비해 철이 일찍 들었었다. 그들의 말에 상처를 받기보다는 왜 예수님 같다고 하는지 성경을 펼쳐 읽어 보았다.그리고 예수님이 죄도 없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쏟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병을 고치려고 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도 없이 나보다 더 고통을 당하셨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쇠를 박는 수술이 이어졌다. 수술 전에 마취에 들어갔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김남현이라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 대단한 의사가 마취를 하며 은경 씨가 평안히 마취가 되도록 직접 찬송가를 불러줬다.수술 중 과다출혈이 되었다. 긴급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병원에 준비된 피로는 역부족이었다. 병원 내 긴급 수혈요청 방송이 됐다. 의대생들이 뛰어와 수혈을 해 위기를 넘겼다.수술 후 통증을 한 달이나 이어졌다. 어느 날은 진료온 김남현의사가 은경씨를 위로하며 이야기 했다. “은경아! 네 수술 과정이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던 과정과 똑 같구나. 머리에 면류관이며 옆구리에 구멍 난 것, 피를 다 쏟았던 것…….그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너도 병을 이기고 일어날 거야…….” 그 고맙고 친절했던 의사는 지금 은퇴 후 옥한음 목사가 시무하던 사랑의 교회 장로로 봉사하며 계시다. 병원에서 자신보다 더 중환자들이 많음을 보았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올케가 꿈 이야기를 했다. 많은 적들에게 쫓기다가 강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너는 능히 건널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은경 씨는 그 꿈이 자신에 관한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남을 도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집에서 간간히 남에게 피아노 지도를 하던 그녀는, 20세쯤 되어 작은 레코드, 선물가게를 열었다. 스스로 벌어 남을 돌 볼 생각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1500만원의 대출을 일으켜 어려운 계층들이 모여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만들었다.처음에는 중간계층의 장애인들이 서로 모여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장애인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그녀 뜻과는 다르게 수시로 장애자녀들을 데려와 몰래 버리고 갔다.그렇게 가족이 형성되었다.혼자서 힘이 들어 못견뎌할 즈음, 최요한 형제가 들어왔다. 당시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의 치유 불가한 저혈압, 심각한 심장박동, 구토…….갖은 질병을 앓고 있던 그는 꿈꾸던 신학을 포기하고, 은경 씨의 손과 발이 되어 장애우들을 섬겨주었다.(이제는 치유되었다.)“10년간 6명의 자녀를 가슴에 묻고 눈물짓는 한국의 ‘테레사’그녀는 91년부터 2009년까지, 자신의 가슴으로 낳아 기르던 6명의 자녀를 떠나보냈다. 많은 질병으로 시달리는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다 보면, 좀 무뎌지기도 하련만은…….하는 생각은 가슴이 메마른 내 생각이었다. 장 원장은 그들을 모두 가슴에 묻었다.보낸 아이들 이야기 할 때, 그녀의 잔잔하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장남 덕우와의 이별을 이렇게 표현했다.“맑고 의젓하고 삶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했던 머스마,/ ...때론 분노하고 가슴을 치기도 했던 나의 몸짓이 / 유독 네 앞에 서면 잔잔해지곤 했었지. /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 장남! / 울 엄마도 울 언니도 장남은 어려워하더라. / 나도 네가 듬직해서 어려워 했었나보다. /...그렇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너를 보내야 했던 날. / 뽀개지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 너의 눈을 감기고……./ 싸늘한 영안실로 너를 보내놓고 / ...얼마나 발가락 끝까지 고인 눈물을 짜냈는지./ 또 얼마나 오래 수저 드는 일을 힘들어 했는지...-‘나의 장남 덕우야.’ 중또 영진 이를 보내고 펜을 들었다. “한없이 맑았던 아이,/ 노래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삼촌을 너무도 사랑했던 /우리 영진 이는 단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한 몸 그대로 / 세상과 이별하려 한다.언제나 그래왔지만 손을 놓지 못하겠다고 주님께 매달렸었다. / 제발 내 목숨 반절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 애원도 했었다.../ 인간적인 미련과 나의 욕심은 / 내 설움에 겨워 발작을 해 댄다.― “사랑한다, 영진아! ‘ 중그녀는 이제 남은 16명의 자녀들에게 더 맛난 음식을 해주고파서 한식 조리사 자격을 땄다.“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편히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이야기 하는 그녀를 보며 ‘사랑에도 욕심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초대석
    2011-09-29
  • 1004번 안경버스 운전사
    전국의 어려운 이들에게 안경을 맞춰주러 다니는 부부죽을 만큼 어려웠던 지난 삶 딛고, 세상의 빛과 소금된 부부누군가 무료 안경 해주러 전국을 다니는 부부가 이천에 있다 해서 수소문 후, 지난달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저희 부부 미국에 아들 만나러 가요. 다녀와서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1개월쯤 지나 불현듯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박종월입니다.아! 안녕하세요? 지금 막 공항에 내렸습니다…….” 미국방문 후 공항에 방금 도착했다고 한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인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월요일 아침에 부발 아미리 자택을 방문했다. 두 부부가 반겼다. 박 씨는 강인한 외모에 매우 건강하고 젊어 보이는 환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기와집 2층 주택 1층에는 나무로 실내가 꾸며져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큰 안경점이 차려져 있었다. 마당에는 "큰빛부부안경선교회,JESUS LOVE YOU"라고 쓰인 붉은 색 미니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전국적인 안경봉사하기에 좋은 교통요지인 이천왜 이천에 살게 되었는지 물었다. “전국의 어려운분들 안경을 해드리기 위한 최고의 교통요지가 이천이기에 이천에 살게 되었어요.”라고 했다. 필자는 어리둥절했다. 직장은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내 TM안경점이고 고향은 전북인데 전국적으로 안경봉사를 다니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라서 이천에 오게 되었단다. 필자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도 그가 왜 이천에 와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첫인상에서 그들 부부가 그들이 하고 있는 봉사가 그들 인생의 전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 저들 부부를 저렇듯 환한 미소를 짓게 하고 강한 확신에 거하게 했는가?” 그것이 궁금해졌다. 부부는 2002년5월부터 지금까지 매월 4차례 25인승 버스를 몰고 전국을 돌며, 매월200명에게 안경을 해주고 있다. 25인승 버스까지 구입해서…….소록도, 삼척, 제주도 안다닌 곳이 없다.시가로 개당 5만 원 정도만 해도 월 천만 원, 차량 연료비, 3일간의 봉사 중 두 부부 식대, 여관비…….테크노마트 안경점에서 얼마나 수입이 나오기에 저리하는가? 그들의 선행동기가 더 궁금해졌다.죽을것만 같았단 암흑 속의 어린시절, 잡초같았던 땅 끝인생그의 과거이야기를 들으며 고생담으로 듣기에는 너무 힘든 과거였기에 그의 고통이 다시 살아나 괴로워하면 어쩌나하고 두려울 정도였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진 날 그는 순창 인근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5 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마차를 가진 부요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부요함이 불행의 원인이었다. 마차를 몰며 운임을 받던 아버지는 장에 다니며 바람을 피웠다. 그중 한 첩에게서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날 즈음 노름, 술, 담배, 여자에 빠진 아버지는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었고, 참다못한 어머니는 아들과 아버지를 버리고 이웃의 젊고 능력 있는 남자를 따라갔다.버림받은 아버지는 첫째 부인에게 돌아갔고 어린 박 씨와 친누이는 첫 부인이 낳은 배다른 형 3명과 한집에 살았다. 그나마도 수 년 후 6 학년 때 아버지와 박 씨는 큰어머니로부터 또 버림을 받았다. 아버지와 싸운 큰어머니가 당신이 낳은 아들 3명을 데리고 병든 아버지와 배다른 자식들을 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두 어머니 부터 버림받았던 어린시절, 또순이 아내를 만나 예수 믿게된 장년시절,인생 후반은 예수님말씀따라이웃 섬기는 삶"“두 어머니로 부터 버림받았던 어린 시절, 살인미수로 지명수배 되었던 청년시절, 또순이 아내만나 예수 믿게 된 장년시절, 인생후반은 예수님말씀따라 이웃 섬기는 삶”그의 표현을 인용한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와 연약한 소년, 가난과 죽음의 공포로 둘러싸인 초막집,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소년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밤새 시달리며 다음날은 어떻게 빌어먹어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 그날도 아버지는 나를 당신의 다리미무릎사이에 끼고 주무셨다. 잠에서 깨어 나오려고 하니 아버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버지,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축복의 시작! 아내와 교회와의 만남초등학교만 나온 그는 서울로 상경해 소년원과 경찰서를 36번이나 드나드는 잡초 같은‘ 땅 끝 인생’을 살게 된다. 성장해서 노름,과일장사,싸움,술,중동근로생활,택시…….안 해본 것 없던 그는 양장점 보조로 일하던 똑순이 같은 아내를 만나게 되고, 함께 양장점을 하던 어느 날 옷을 수선하러온 교회 다니는 손님에게 사정해서 교회를 다니게 된다. 처음엔 교회 가서 공부를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아내는 교회 앞에 쓰여 있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그 후로도 나는 노름, 술…….에 절어 지냈지만 아내는 기도하며 그릇된 길을 가는 나를 지남철같이 바로 끌어 당겼다. 처남을 자식처럼 돌보던 박씨는, 안경원에 취업을 시켰다. 처남은 안경에 재능을 나타냈다. 박 씨는 아파트를 팔아 처남에게 안 경원을 차려주고 함께 경영을 하였다. 내 인생을 바꾸게 된 '봉고차 안경원'과의 만남부부는 중, 고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초당대 안경학과를 함께 졸업했다.재학시절 수업 중 약시, 사시 등은 일곱 살 전에 검사해서 발견만하면 쉽게 평생을 건강한 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에 솔깃했다. 아내가 “여보 우리에게 안 경원을 하게 하시고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그래 우리도 이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자!”부부는 안경학과 지상택 교수와 상의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교수는 좋아하며 자신도 돕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지교수가 학교로 불러 갔더니 12인승 봉고차가 와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봉고차 안경원입니다.” 그 후 부부의 머릿속에는 ‘움직이는 안경원’이 떠날 줄 몰랐다. 졸업 전 가족 기도회 때 졸업 후 이동 안경원을 만들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발표를 했다. 아들 영모, 딸 영신이는 기뻐했다. 아빠는 할 수 있을 꺼라 격려했다.(아들은 아버지의 변화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후 법관이 되려다 길을 바꿔 ,총신대 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딸 영신이는 단국대를 나와 선교사 남편과 선교사준비를 하고 있다.)“시골 교회와 함께 봉사해요.” “시신 기증했으니, 이제 가난한 나라에 안경학교 세워 줄 일만 남았네요.”그들은 봉사를 나갈 때 시골 교회의 도움을 받는다. 가기 전 40명의 예약자를 맞춰야 버스가 출발할 수 있다. 미리 안경이 필요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모으는 것은 이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개월에 4회, 2박 3일간 40명에게 안경을 맞추고 제공하는 일은 이들 부부에 못지않게 수고해주는 현지 봉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 외에는 도움 받을 길이 없었다. 동사무소나 이장, 단체 등에 부탁을 해보았지만 40명 예약을 받고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사람을 모으고, 점심 대접을 하고, 안경을 맞춘 후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 등의 뒷바라지를 도와줄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2006년 지방에서 서울 집으로 올라오던 부부는 운전에 지친 나머지 영동, 중부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이천에 거주하면 봉사를 더 많이 힘 있게 하게 될 것이란 생각에 영동고속도로 IC 인근에 이사 오게 된다.(이야기를 듣던 필자는 이제야 이천에 살게 된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실제 이사 후 한번 봉사 나가서 두 군데씩 뛸 수 있게 되었다며 환히 웃었다.2006년 5월23일 부부는 연대 의과대학에 가서 시신기증등록을 했다.시신기증 후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아내가 한마디 했다.“여보, 이제 할 일이 딱하나 남았네요.” “뭐! 몸까지 다 기증했는데 뭐가 남아?”“결혼 할 때 약속한 것, 어려운 나라에 안경대학 세워준다는...”이제 그거만 지키면 되요. “ /이계찬
    • 초대석
    2011-09-16
  • 1004번 안경버스 운전사
    전국의 어려운 이들에게 안경을 맞춰주러 다니는 부부죽을 만큼 어려웠던 지난 삶 딛고, 세상의 빛과 소금된 부부누군가 무료 안경 해주러 전국을 다니는 부부가 이천에 있다 해서 수소문 후, 지난달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저희 부부 미국에 아들 만나러 가요. 다녀와서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1개월쯤 지나 불현듯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박종월입니다.아! 안녕하세요? 지금 막 공항에 내렸습니다…….” 미국방문 후 공항에 방금 도착했다고 한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인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월요일 아침에 부발 아미리 자택을 방문했다. 두 부부가 반겼다. 박 씨는 강인한 외모에 매우 건강하고 젊어 보이는 환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기와집 2층 주택 1층에는 나무로 실내가 꾸며져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큰 안경점이 차려져 있었다. 마당에는 "큰빛부부안경선교회,JESUS LOVE YOU"라고 쓰인 붉은 색 미니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전국적인 안경봉사하기에 좋은 교통요지인 이천왜 이천에 살게 되었는지 물었다. “전국의 어려운분들 안경을 해드리기 위한 최고의 교통요지가 이천이기에 이천에 살게 되었어요.”라고 했다. 필자는 어리둥절했다. 직장은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내 TM안경점이고 고향은 전북인데 전국적으로 안경봉사를 다니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라서 이천에 오게 되었단다. 필자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도 그가 왜 이천에 와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첫인상에서 그들 부부가 그들이 하고 있는 봉사가 그들 인생의 전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 저들 부부를 저렇듯 환한 미소를 짓게 하고 강한 확신에 거하게 했는가?” 그것이 궁금해졌다. 부부는 2002년5월부터 지금까지 매월 4차례 25인승 버스를 몰고 전국을 돌며, 매월200명에게 안경을 해주고 있다. 25인승 버스까지 구입해서…….소록도, 삼척, 제주도 안다닌 곳이 없다.시가로 개당 5만 원 정도만 해도 월 천만 원, 차량 연료비, 3일간의 봉사 중 두 부부 식대, 여관비…….테크노마트 안경점에서 얼마나 수입이 나오기에 저리하는가? 그들의 선행동기가 더 궁금해졌다.죽을것만 같았단 암흑 속의 어린시절, 잡초같았던 땅 끝인생그의 과거이야기를 들으며 고생담으로 듣기에는 너무 힘든 과거였기에 그의 고통이 다시 살아나 괴로워하면 어쩌나하고 두려울 정도였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진 날 그는 순창 인근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5 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마차를 가진 부요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부요함이 불행의 원인이었다. 마차를 몰며 운임을 받던 아버지는 장에 다니며 바람을 피웠다. 그중 한 첩에게서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날 즈음 노름, 술, 담배, 여자에 빠진 아버지는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었고, 참다못한 어머니는 아들과 아버지를 버리고 이웃의 젊고 능력 있는 남자를 따라갔다.버림받은 아버지는 첫째 부인에게 돌아갔고 어린 박 씨와 친누이는 첫 부인이 낳은 배다른 형 3명과 한집에 살았다. 그나마도 수 년 후 6 학년 때 아버지와 박 씨는 큰어머니로부터 또 버림을 받았다. 아버지와 싸운 큰어머니가 당신이 낳은 아들 3명을 데리고 병든 아버지와 배다른 자식들을 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두 어머니 부터 버림받았던 어린시절, 또순이 아내를 만나 예수 믿게된 장년시절,인생 후반은 예수님말씀따라이웃 섬기는 삶"“두 어머니로 부터 버림받았던 어린 시절, 살인미수로 지명수배 되었던 청년시절, 또순이 아내만나 예수 믿게 된 장년시절, 인생후반은 예수님말씀따라 이웃 섬기는 삶”그의 표현을 인용한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와 연약한 소년, 가난과 죽음의 공포로 둘러싸인 초막집,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소년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밤새 시달리며 다음날은 어떻게 빌어먹어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 그날도 아버지는 나를 당신의 다리미무릎사이에 끼고 주무셨다. 잠에서 깨어 나오려고 하니 아버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버지,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축복의 시작! 아내와 교회와의 만남초등학교만 나온 그는 서울로 상경해 소년원과 경찰서를 36번이나 드나드는 잡초 같은‘ 땅 끝 인생’을 살게 된다. 성장해서 노름,과일장사,싸움,술,중동근로생활,택시…….안 해본 것 없던 그는 양장점 보조로 일하던 똑순이 같은 아내를 만나게 되고, 함께 양장점을 하던 어느 날 옷을 수선하러온 교회 다니는 손님에게 사정해서 교회를 다니게 된다. 처음엔 교회 가서 공부를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아내는 교회 앞에 쓰여 있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그 후로도 나는 노름, 술…….에 절어 지냈지만 아내는 기도하며 그릇된 길을 가는 나를 지남철같이 바로 끌어 당겼다. 처남을 자식처럼 돌보던 박씨는, 안경원에 취업을 시켰다. 처남은 안경에 재능을 나타냈다. 박 씨는 아파트를 팔아 처남에게 안 경원을 차려주고 함께 경영을 하였다. 내 인생을 바꾸게 된 '봉고차 안경원'과의 만남부부는 중, 고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초당대 안경학과를 함께 졸업했다.재학시절 수업 중 약시, 사시 등은 일곱 살 전에 검사해서 발견만하면 쉽게 평생을 건강한 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에 솔깃했다. 아내가 “여보 우리에게 안 경원을 하게 하시고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그래 우리도 이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자!”부부는 안경학과 지상택 교수와 상의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교수는 좋아하며 자신도 돕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지교수가 학교로 불러 갔더니 12인승 봉고차가 와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봉고차 안경원입니다.” 그 후 부부의 머릿속에는 ‘움직이는 안경원’이 떠날 줄 몰랐다. 졸업 전 가족 기도회 때 졸업 후 이동 안경원을 만들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발표를 했다. 아들 영모, 딸 영신이는 기뻐했다. 아빠는 할 수 있을 꺼라 격려했다.(아들은 아버지의 변화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후 법관이 되려다 길을 바꿔 ,총신대 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딸 영신이는 단국대를 나와 선교사 남편과 선교사준비를 하고 있다.)“시골 교회와 함께 봉사해요.” “시신 기증했으니, 이제 가난한 나라에 안경학교 세워 줄 일만 남았네요.”그들은 봉사를 나갈 때 시골 교회의 도움을 받는다. 가기 전 40명의 예약자를 맞춰야 버스가 출발할 수 있다. 미리 안경이 필요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모으는 것은 이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개월에 4회, 2박 3일간 40명에게 안경을 맞추고 제공하는 일은 이들 부부에 못지않게 수고해주는 현지 봉사자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 외에는 도움 받을 길이 없었다. 동사무소나 이장, 단체 등에 부탁을 해보았지만 40명 예약을 받고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사람을 모으고, 점심 대접을 하고, 안경을 맞춘 후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 등의 뒷바라지를 도와줄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2006년 지방에서 서울 집으로 올라오던 부부는 운전에 지친 나머지 영동, 중부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이천에 거주하면 봉사를 더 많이 힘 있게 하게 될 것이란 생각에 영동고속도로 IC 인근에 이사 오게 된다.(이야기를 듣던 필자는 이제야 이천에 살게 된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실제 이사 후 한번 봉사 나가서 두 군데씩 뛸 수 있게 되었다며 환히 웃었다.2006년 5월23일 부부는 연대 의과대학에 가서 시신기증등록을 했다.시신기증 후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아내가 한마디 했다.“여보, 이제 할 일이 딱하나 남았네요.” “뭐! 몸까지 다 기증했는데 뭐가 남아?”“결혼 할 때 약속한 것, 어려운 나라에 안경대학 세워준다는...”이제 그거만 지키면 되요. “ /이계찬
    • 초대석
    2011-09-16
  •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KTX 노선양평 포함된 중앙선 우선적 검토 대상정치인으로서 내년 총선 출마 위해 장관직 사퇴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한나라당 양평 가평 국회의원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 총학생회 부활 준비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젊은 시절 국민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 우리 사회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인연이 되어 김 前대통령의 비서로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이제 정치인 출신으로서 다시 내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국정운영을 하면서 미비했던 점들은 국회에서 제도 개선을 통해 하나 둘씩 고쳐나가도록 하겠다. 그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지역주민과 대화를 하거나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앞으로 선거때까지 지역주민들과 많이 만나고 애로사항을 들을 것이며, 머리를 맞대고 지역발전의 방향을 논의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평창동계올림픽 KTX 노선은 2017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잘 진행되고 있다. 내년 원주까지 복선전철이 완공될 것이고, 원주-강릉 구간은 현재 실시설계중이다. KTX 노선은 동계올림픽유치 과정에서 IOC에 약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계획대로 진행 될 것이 확실하다.현재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기본안은 기존의 중앙선 구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막상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실현되고 나니까 각 지자체에서 지역발전을 위한 차원에서 중앙정부에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자체의 안 일 뿐이며,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도 건의를 받고 있는 단계이지, 아직 검토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양평이 포함된 기본 안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고 소신을 밝히는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우선 선거를 위해 전력투구를 해서 지역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우선이다. 만약 제가 내년에도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받는다면 4선 국회의원이 된다. 그동안 3선 의원으로서 집권여당의 사무총장,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미래,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지 못한 일들도 많다. 앞으로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양평가평문화,관광,환경,교육접목된수도권 최고명품 도시 만들터 정병국 문화체육관광장관 한나라당 양평,가평 국회의원대담 : 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정병국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양평, 가평 발전의 디딤돌을 마련하였고 한나라당 사무총장으로 재임 활발한 의정활동의 발자취 문화체육관광장관으로서 이 나라 문화 체육 관광 분야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는데 오늘날 최고의 지도자를 이루기까지 과정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본지 하나로신문 정봉영발행인과의 대담으로 올바른 평가와 검증으로 국민들과 지역주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정병국 장관의 의정 양평 가평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약력 1958년 경기 양평 출생. 1984년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2004년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2000년~현재 16․17․18대 국회의원(경기 양평 가평). 2004년 한나라당 언론발전특별위원장. 2007년 17대 대선 한나라당 미디어홍보단장. 2009년 한나라당 서민행복추진본부장. 2010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2010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현,문화체육관광부 장관 2번유치 실패딛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한 것 가장 자랑머리로는 바른 생각을 하고 몸은 성실하게 실천할 것 1. 한나라당 양평, 가평 3선 국회의원과 문화체육관광장관에 재임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내년 총선에 출마를 하기 위해 장관직 사임을 표명하였는데 특별한 동기와 계기가 있으시다면 소개 해 달라? ▶이제 정치인 출신으로서 다시 내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국정운영을 하면서 미비했던 점들은 국회에서 제도 개선을 통해 하나 둘씩 고쳐나가도록 하겠다. 그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지역주민과 대화를 하거나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앞으로 선거때까지 지역주민들과 많이 만나고 애로사항을 들을 것이며, 머리를 맞대고 지역발전의 방향을 논의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 2.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서 부임하여 이룬 결실이나 업적이 있다면? ▶가정 먼저 지난 두 번의 실패를 딛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또한 145년 만에 외규장각의궤를 반환받았다는 것도 앞으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 세계 K-POP 열풍, 한류 확산에 일조했다. 더불어 대중문화발전을 위한 후속조치로 대중예술 공연장을 만들고 또한 인디밴드들의 활동공간도 확보했다. 3. 장관 재직시 문화재정 확보를 강조했는데 어떤 이유인가? ▶그동안 정부 예산 편성은 산업화가 중심이었다. 산업화의 근간인 철강과 자동차, 선박, 그리고 이후 반도체와 정보기술(IT) 분야에 재정의 2~7%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가 새로운 과제다. 갈수록 문화 산업의 비중이 커질 것이다. 세계시장 규모로 봐도 자동차가 1조2000억 달러, IT가 800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문화 산업은 1조4000억 원이 넘는데다 매년 5% 이상 고성장하고 있다. 한국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 산업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고용 없는 성장이나 청년 실업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문화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다. 그 때문에 문화재정 확충을 위해 정부와 여당을 설득하는데 힘을 쏟았다. 4. 기존의 장관들과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신선했다는 평가가 있다. ▶“답은 현장에 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책상 앉아서 서류로 보고를 받고 결정을 하는 탁상행정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관행처럼 굳어진 신임 장관의 실국별 업무보고를 받지 않고 관련 업계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문화부의 업무를 보고했다. 그 현장에서 나온 각종 지적사항, 제안 들이 270여 건이나 되었다. 이를 내 책상위에 모두 적어놓고 진행경과를 매일매일 체크하고 점검했다. 그렇게 해야만 바뀐다고 판단하고 있다. 5.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간단히 소개 한다면?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 총학생회부활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젊은 시절 국민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 우리 사회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인연이 되어 김 前대통령의 비서로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6. 우리 국민 모두의 염원인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진두지휘를 하면서 마침내 유치에 성공 하였는데 역할과 업적을 간단히 소개 한다면? ▶1월26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IOC 위원들을 만나기 위해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IOC 위원들을 설득학 위해 9차례나 해외로 갔다. 그분들과 접촉하면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열망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분들의 취미, 가족관계 등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다 체크하면서 IOC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준비를 했다. 또한 유치위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것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의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쾌거는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루어낸 성과라고 생각한다. 7. 구체적으로 과거 유치과정에서 어떤 점들이 지적되었다고 보는가?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먼저 지난 두 차례의 실패 요인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의외로 큰 사안보다 작고 사소한 문제들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서포터스들이 현지에 가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 호텔 주변에서 아침저녁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응원하는데 그런 게 오히려 IOC 위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통령이 움직이면 20~30명이나 되는 경호원과 수행원이 함께 가는데 이것도 감점 요인이 된다. 이런 것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각계를 대표하는 대표단이 100명 정도 되는데, 이분들도 IOC 위원들을 접촉해 뭔가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과거 한두 번 만난 작은 인연만 있어도 그것을 근거로 IOC 위원들을 만나려고 드는데 과거 IOC 위원들이 귀찮아하고 불쾌하게 생각해 공식적인 항의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런 부분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많은 분들이 잘 협조해 줬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우리 정부측 관계자, 유치위 관계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IOC 위원들이 한국이 예전보다 상당히 세련됐다는 평가를 했다. 그 결과 작지만 세심한 배려가 결국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본다. 7. 내년 총선이후 정치 계획과 진로를 밝혀 달라? ▶우선 선거를 위해 전력투구를 해서 지역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우선이다. 만약 제가 내년에도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받는다면 4선 국회의원이 된다. 그동안 3선 의원으로서 집권여당의 사무총장,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미래,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지 못한 일들도 많다. 앞으로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8. 양평군과 가평군이 그동안 타 지역에 비해 수도권이라는 미명아래 각종 중첩 제재로 인해 지역이 많이 낙후 되어 주민들이 불평불만이 고조 되고 있는데 대한 근본적인 지역 발전 대책과 개발 계획에 대해 소개해 달라? ▶우리 양평, 가평은 무엇보다도 중첩규제로 고통 받고 있다. 규제개선이 지역발전의 최우선 과제이다. 지금까지 국회의원을 하면서 이러한 규제들을 해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2009년 12월 수질오염총량관리제 도입을 통해 지역개발사업과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등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 초대석
    2011-09-11
  •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KTX 노선양평 포함된 중앙선 우선적 검토 대상정치인으로서 내년 총선 출마 위해 장관직 사퇴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한나라당 양평 가평 국회의원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 총학생회 부활 준비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젊은 시절 국민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 우리 사회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인연이 되어 김 前대통령의 비서로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이제 정치인 출신으로서 다시 내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국정운영을 하면서 미비했던 점들은 국회에서 제도 개선을 통해 하나 둘씩 고쳐나가도록 하겠다. 그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지역주민과 대화를 하거나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앞으로 선거때까지 지역주민들과 많이 만나고 애로사항을 들을 것이며, 머리를 맞대고 지역발전의 방향을 논의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평창동계올림픽 KTX 노선은 2017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잘 진행되고 있다. 내년 원주까지 복선전철이 완공될 것이고, 원주-강릉 구간은 현재 실시설계중이다. KTX 노선은 동계올림픽유치 과정에서 IOC에 약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계획대로 진행 될 것이 확실하다.현재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기본안은 기존의 중앙선 구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막상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실현되고 나니까 각 지자체에서 지역발전을 위한 차원에서 중앙정부에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자체의 안 일 뿐이며,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도 건의를 받고 있는 단계이지, 아직 검토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양평이 포함된 기본 안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본다.고 소신을 밝히는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우선 선거를 위해 전력투구를 해서 지역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우선이다. 만약 제가 내년에도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받는다면 4선 국회의원이 된다. 그동안 3선 의원으로서 집권여당의 사무총장,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미래,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지 못한 일들도 많다. 앞으로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양평가평문화,관광,환경,교육접목된수도권 최고명품 도시 만들터 정병국 문화체육관광장관 한나라당 양평,가평 국회의원대담 : 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정병국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양평, 가평 발전의 디딤돌을 마련하였고 한나라당 사무총장으로 재임 활발한 의정활동의 발자취 문화체육관광장관으로서 이 나라 문화 체육 관광 분야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는데 오늘날 최고의 지도자를 이루기까지 과정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본지 하나로신문 정봉영발행인과의 대담으로 올바른 평가와 검증으로 국민들과 지역주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정병국 장관의 의정 양평 가평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약력 1958년 경기 양평 출생. 1984년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2004년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2000년~현재 16․17․18대 국회의원(경기 양평 가평). 2004년 한나라당 언론발전특별위원장. 2007년 17대 대선 한나라당 미디어홍보단장. 2009년 한나라당 서민행복추진본부장. 2010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2010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현,문화체육관광부 장관 2번유치 실패딛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한 것 가장 자랑머리로는 바른 생각을 하고 몸은 성실하게 실천할 것 1. 한나라당 양평, 가평 3선 국회의원과 문화체육관광장관에 재임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내년 총선에 출마를 하기 위해 장관직 사임을 표명하였는데 특별한 동기와 계기가 있으시다면 소개 해 달라? ▶이제 정치인 출신으로서 다시 내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국정운영을 하면서 미비했던 점들은 국회에서 제도 개선을 통해 하나 둘씩 고쳐나가도록 하겠다. 그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지역주민과 대화를 하거나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 앞으로 선거때까지 지역주민들과 많이 만나고 애로사항을 들을 것이며, 머리를 맞대고 지역발전의 방향을 논의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 2.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서 부임하여 이룬 결실이나 업적이 있다면? ▶가정 먼저 지난 두 번의 실패를 딛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또한 145년 만에 외규장각의궤를 반환받았다는 것도 앞으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 세계 K-POP 열풍, 한류 확산에 일조했다. 더불어 대중문화발전을 위한 후속조치로 대중예술 공연장을 만들고 또한 인디밴드들의 활동공간도 확보했다. 3. 장관 재직시 문화재정 확보를 강조했는데 어떤 이유인가? ▶그동안 정부 예산 편성은 산업화가 중심이었다. 산업화의 근간인 철강과 자동차, 선박, 그리고 이후 반도체와 정보기술(IT) 분야에 재정의 2~7%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가 새로운 과제다. 갈수록 문화 산업의 비중이 커질 것이다. 세계시장 규모로 봐도 자동차가 1조2000억 달러, IT가 800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문화 산업은 1조4000억 원이 넘는데다 매년 5% 이상 고성장하고 있다. 한국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 산업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고용 없는 성장이나 청년 실업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문화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다. 그 때문에 문화재정 확충을 위해 정부와 여당을 설득하는데 힘을 쏟았다. 4. 기존의 장관들과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신선했다는 평가가 있다. ▶“답은 현장에 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책상 앉아서 서류로 보고를 받고 결정을 하는 탁상행정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관행처럼 굳어진 신임 장관의 실국별 업무보고를 받지 않고 관련 업계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문화부의 업무를 보고했다. 그 현장에서 나온 각종 지적사항, 제안 들이 270여 건이나 되었다. 이를 내 책상위에 모두 적어놓고 진행경과를 매일매일 체크하고 점검했다. 그렇게 해야만 바뀐다고 판단하고 있다. 5.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간단히 소개 한다면?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 총학생회부활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젊은 시절 국민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찾고 우리 사회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것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화운동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인연이 되어 김 前대통령의 비서로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6. 우리 국민 모두의 염원인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진두지휘를 하면서 마침내 유치에 성공 하였는데 역할과 업적을 간단히 소개 한다면? ▶1월26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IOC 위원들을 만나기 위해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IOC 위원들을 설득학 위해 9차례나 해외로 갔다. 그분들과 접촉하면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열망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분들의 취미, 가족관계 등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다 체크하면서 IOC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준비를 했다. 또한 유치위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것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의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 쾌거는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루어낸 성과라고 생각한다. 7. 구체적으로 과거 유치과정에서 어떤 점들이 지적되었다고 보는가? ▶이번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먼저 지난 두 차례의 실패 요인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의외로 큰 사안보다 작고 사소한 문제들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서포터스들이 현지에 가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 호텔 주변에서 아침저녁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응원하는데 그런 게 오히려 IOC 위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통령이 움직이면 20~30명이나 되는 경호원과 수행원이 함께 가는데 이것도 감점 요인이 된다. 이런 것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각계를 대표하는 대표단이 100명 정도 되는데, 이분들도 IOC 위원들을 접촉해 뭔가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과거 한두 번 만난 작은 인연만 있어도 그것을 근거로 IOC 위원들을 만나려고 드는데 과거 IOC 위원들이 귀찮아하고 불쾌하게 생각해 공식적인 항의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런 부분을 철저하게 관리했고 많은 분들이 잘 협조해 줬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우리 정부측 관계자, 유치위 관계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IOC 위원들이 한국이 예전보다 상당히 세련됐다는 평가를 했다. 그 결과 작지만 세심한 배려가 결국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본다. 7. 내년 총선이후 정치 계획과 진로를 밝혀 달라? ▶우선 선거를 위해 전력투구를 해서 지역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우선이다. 만약 제가 내년에도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받는다면 4선 국회의원이 된다. 그동안 3선 의원으로서 집권여당의 사무총장,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미래,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지 못한 일들도 많다. 앞으로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8. 양평군과 가평군이 그동안 타 지역에 비해 수도권이라는 미명아래 각종 중첩 제재로 인해 지역이 많이 낙후 되어 주민들이 불평불만이 고조 되고 있는데 대한 근본적인 지역 발전 대책과 개발 계획에 대해 소개해 달라? ▶우리 양평, 가평은 무엇보다도 중첩규제로 고통 받고 있다. 규제개선이 지역발전의 최우선 과제이다. 지금까지 국회의원을 하면서 이러한 규제들을 해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2009년 12월 수질오염총량관리제 도입을 통해 지역개발사업과 대규모 관광단지 조성 등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 초대석
    2011-09-11
  • .‘위기 청소년의 등대’ 여주 민들레 학교 김진명 교장
    집단 패싸움, 여고생들, 모범학생들로 변화 “학교에서 놀라워해…….”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교장과 20년 동안 새마을 운동 함께해……. 위기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치유해 남을 돕는 자로 세우고파!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교장과 함께 새마을 운동하며 살아온 세월” 평소 위기의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우리지역에서 청소년들을 치유, 선도하는 기관이 어딘지 늘 궁금해 했다. 知人이 이천 치유 문화원 이진숙원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이천최고의 아이들의 상처치유 전문가라는 멘트와 함께……. 간신히 이천에서 위기의 청소년들을 음악, 관계를 통해 치유하고 있는 이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저보다 더 열심히 뛰는 분을 소개해 드릴께요” 라며 여주 민들레학교 김진명 교장을 소개하였다. 여주대 건너편 여주기독교회관 內 1층 맨 끝 방에서 김 교장을 만났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김용기장로를 도와 새마을운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지요. 68년 그의 나이 29세 때 ‘새마을 만세‘영화를 보고 새마을 운동에 매료됐다는 그는 직장(삼풍건설)을 사직하고 서울 하일동에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교장을 찾아가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김용기 교장은 신원보증서…….10여 가지 서류를 구비해오라고 했다. 까다로우면 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말씀하신 것 이었는데 김진명씨는 바로 준비해 제출하였다. 새벽 4;30분부터 밤 10시까지 입소 생들의 정신과 행동을 개혁하는 고된 일과 속에 사감을 맡아 일을 했다. 월급도 없이 가나안 농군학교가 좋아서 헌신했다. 김용기원장과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이 맞아 자기희생을 한 것이었다. “김용기교장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이셨지요. 다섯 자녀들도 대단했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말씀에 토를 다는 자녀가 없었어요. 외출 時는 꼭 보고하고 나가고, 무얼 사라고 돈을 받으면, 사고 나서 100원 잔돈까지 아버지에게 반납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김용기 원장이 어느 날 김진명씨를 불렀다. 않은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며(김 원장은 심각한 얘기를 할 때는 몸을 좌우로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김 원장이 말했다.“자네 가나안 농장 내 가나안 교회 전도사 딸과 결혼의향이 있는가?” 평소 한결같이 성실, 정직했던 김진명씨를 인정했기에 중매를 섰던 것이었다. 그때는 그분의 말씀이 법으로 알았었다. “그때 그 신부가 지금의 처입니다” 결혼 전에는 월급도 없이 봉사했으나 결혼 후에는 월60만원씩 생활비를 받았다. 자녀 둘은 잘 자라 딸은 출가하고 아들은 건국대 입학사정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어제 아들이 다니러 와서 ‘아버님 돈 걱정 마시고 ’민들레 학교‘열심히 하세요!”라고 격려해주고 올라갔어요. “목회를 하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 같아 사직” 김진명씨는 김용기 교장이 돌아가신 후 양평에서 목회를 했던 적이 있다. 목회를 하던 어느 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 목회를 그만두었다. “나 자신도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습관적인 목회를 했었어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 이었죠” 그 후 그는 위기의 청소년들을 위한 “민들레학교”를 알게 되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그의 ‘이웃사랑’정신은 ‘위기의 청소년 사랑’으로 바뀌어 불타올랐다. 올 3월에 문을 연 여주 민들레 학교(단기특별교육 대안학교)는 중, 고교에서 징계가 결정된 아이들을 일주일미만의 단기교육(현재는 5일)을 시켜 변화시킨 후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는 ‘교육청 지정 단기대안학교’이다. 교육을 받아 변화 받는 조건으로 퇴학, 등교정지 등의 중징계를 철회시켜 주는 것이다. 본부는 수원에 있으며 수원, 이천, 화성, 양주, 구리, 여주에 지역 학교가 있다. 지도교사는 강의료를 받지 않는 순수 자원봉사교사들이며 지도과목 으로는 김길성 교사(고려대법전공) ‘생활 속 법질서’, 박문신 교사(경희대 외교과,와세다 대학원지방자치과,콜로라도 주립 대) ‘인문학’ 김태희(청주사범본과) ‘인성교육’, 김선옥(원주대 유아교육과) ‘디스크 강의“ 김영신(경희대 사회복지학과) ‘청소년 심리치료’ 김미영 교사(여주 가정-성 폭력 상담소장) ‘가정, 성 폭력 상담’, 이진숙 교사(명지대,동원대 사회복지학과, 이천 치유 문화원 원장) ‘음악치유’, 이미희 교사(여주 금연 클리닉 센터장, 아주대 보건대학원) ‘금연교육’, 이인수 교사(성균관대, 장애인 인권문제 연구소장)’자기개발 프로그램‘ 구철희 교사 ‘청소년 범죄’ 이은향 교사(대구대 사회복지학과, 여주 보건소 복지사)의 ‘청소년 정신’ 홍석영 교사(여주 민예총 사무국장)의 ‘문화예술과 건강한 삶’ 김혜정 교사(여주대 사회복지학과) ‘미술치유’ 등이 있다. 3월에 시작한 여주 민들레 학교는 지금까지 43명의 위기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학교로 복귀하였다. “집단 패싸움으로 처벌위기의 여학생들, 교육받고 모범학생으로 변해” 한번은 00경찰서 형사가 전화를 했다. 여학생들이 집단 패싸움을해 형사 처분과 학교처벌 다 받고 소년원으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서... 결국 경찰, 학교, 민들레 학교 3자가 처벌보다는 착실한 계도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5일 동안 그들을 인격체로 대해줬어요. 문제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믿어주면 변화됩니다. 이 아이들이 교육받고 학교로 돌아가 교무실에서 1시간을 울면서 선생님들께 사과와 고마움을 표하더래요.” 선생님 두 분이 저희사무실로 감사인사를 하려고 찾아 오셨더군요. 오셔서 어떻게 지도했기에 아이들이 저렇게 변화됐느냐고 물으셨지요. “ “‘한국의 폴포트 최성봉’처럼 위기의 청소년들이 우뚝 설수 있어야 나라의 미래가 밝아져…….” -민들레 학교의 미래 계획이 있다면…….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마련, 현재의 단기교육에서 중기, 장기 대안 학교 설립, 학생들에게 직업교육(미용, 예술, 웹디자인, 외국어, 간호 등 )을 시켜 당당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위기의 청소년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국내 케이블 채널 tvN의 오디션 프로‘코리아 갓 탤런트’에 참가해 결승까지 오른 최성봉 군은 위기청소년들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다.(미 CNN에 까지 보도 되 1000만 명 이상이 시청하였다.) 그는 3살 때 고아원에 버려져, 5세 되던 해에 매를 못 이겨 고아원을 탈출해 길거리, 공중화장실 등에서 잠을 자며 껌, 음료 등을 팔던 꿈을 잃은 길거리 불량소년이었다. 이름도 없었다. 아는 이 들은 그를 ‘야’ ‘이 새끼’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사회를 원망해 나쁜 짓도 했었다고 고백하기도 한 그는 포장마차 아줌마의 따뜻한 관심으로 꿈을 갖게 되고 초, 중을 검정고시, 고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아줌마가 지어준 ‘지성’이란 이름을 사랑한다고 했다. 껌을 팔다가 나이트클럽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를 본 그는 노래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꿈을 향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디션 프로에 지원하라고 조언해준 어느 분 에게 감사한다고 하였다. 최 군에게는 포장마차 아줌마, 간간이 성악을 가르쳐준 이웃들, 오디션 프로를 알려준 멘토...착한 이웃들이 있었다. 우리는 제 2,3의 최성봉을 찾아내 그에게 공부와 꿈을 갖도록 해야 한다. 사회에서 그들이 설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멘토가 되고자 한다.
    • 초대석
    201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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