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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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 관한 MOU를 체결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윤두현 서경한우 조합장.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윤두현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윤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서경한우 윤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서경한우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 삼는 선순환 구조로 최고의 조합으로 발돋움시킬 터자체프로그램 중간 마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 저렴한 사료 조합원에게 공급5월 서경한우 더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 직영판매장 오픈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안녕하십니까 서경한우 협동조합 조합장 윤두현입니다.최근 본사와 가공공장 등이 화재로 전소되어 주위에서 우려해 주시고 아픔을 같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겠다는 신념하에 신속한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에 대해 간단히 소개 한다면 ?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농림축산식품부가 한우 전문 품목협동조합으로 인가하여 2012년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460여 조합원과 함께하는 중견급 조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50개월 이내 한우 암소를 유통하는 전문 조합으로서 자체 도축가공과 소매유통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수도권 한우의 가치를 높이는 견인마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서경한우는 수도권 축산업을 지켜내며 농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지역경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질 좋은 청정 한우 생산’을 목표로 조합원의 안정적인 소득향상과 바람직한 한우 먹거리 공급이라는 두 마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합원 임직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질 좋은 한우 암소 고기를 저렴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가격의 현실화를 이룩하였고 이와 함께 품질 고급화와 다양한 메뉴를 개발 공급하여 직영판매식당을 이용하는 고객 누구나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 좋은 결실을 얻고 있습니다.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은 금용사업을 하고있지 않고 있으며, 소를 어떻게 잘 팔것인가?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에 집중하는 협동조합입니다3. 서울경기 한우협동조합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과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서경한우 자체프로그램으로 중간 마진을 최소화한 OEM 사료 생산하여 저렴한 사료를 조합원에게 공급하고 있으며 초음파 및 거세 지원 등 다양한 사양지도 사업 등으로 조합원분들이 한우를 잘 키우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한우 지역 축산농가와의 동반성장을 목표로 매년 자체도축 비율을 높여왔으며, ‘돌보미사업장’ 활성화를 통해 ‘대리 축산영농 시스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서경한우는 조합원의 소득 증대를 핵심 이념으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왔습니다. 자체도축은 지난해 기준 833두이며, 올해는 약 50% 정도 늘어난 1,200두로 예상됩니다. 또 올해 이익은 5억 원 규모로 예상되는데요, 이중 2억 7천만 원은 배당금으로서 조합원의 몫입이다.”서경한우는 또 비대면 유통망 확충에도 힘 쏟고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온라인 판매 실적이 크게 향상되면서 온라인 마켓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4억 규모였던 매출액이 금년에는 무려 15억 규모로 성장했다.4.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윤 조합장은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조합원의 행복’에서 찾는다. 이윤의 상당 부분을 조합원에게 환원함으로써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다시금 조합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순환 구조야말로 서경한우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를 잘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잘 팔아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값 하락으로 어려워하는 조합원이 안정적으로 소를 키울 수 있고 잘 키운 소를 잘 팔아 줄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5.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사항을 밝힌다면 ?자체도축으로 지난해 1,500두를 가공 판매하였습니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경한우 직영점과 함께 체인점이 서울 남대문, 안양 백미점, 시흥점, 동탄점, 용인점 등 5개가 있으며,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여 다양한 채널로 서경한우를 만나 볼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또한, 서경한우는 올해 한우전문점 소들녘과 최근 미경산 한우사업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서경한우는 직영점인 서경한우프라자 뿐 아니라 소들녘을 통해서도 미경산 암소를 안정적으로 유통하게 된 것이다. 미경산 한우는 30개월 내외의 한우로 최상의 품질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시중에서 새끼를 여러 번 낳은 암소 고기는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경산 한우는 매우 희귀한 고기로서, 사실상 서경한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품이다. 희소성 뿐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 최고급 식재료와 품격을 모두 원하는 소비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6.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 그동안 추진사항과 앞으로의 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화재 복구를 조속히 하는 것에 힘쓸 것이며, 서울경기한우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암소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천지역은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면이 많습니다. 수도권의 고객분들이 이천 서경한우를 찾아와 이천이 한우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한우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7. 서경한우 직영 판매 식당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 부담없는 가격으로 프리미엄급 한우암소를 즐길수 있는 수도권 명소로 자리잡는 것을 비젼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고객분들이 이용해주셔서 나름 많이 알려졌지만 더욱 노력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서경한우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이천 관고시장에 직영판매장을 오픈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현재 운영 중인 서경한우프라자 마장면 본점과 이천점, 양지점을 활성화하고 농협 하나로마트 8개소와 소들녘 등 유통업체 7개소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아울러 헬로네이처와 중소기업유통센터쇼핑몰, 미국 Hmart 등 소매 유통망을 다지고, 다른 온라인 쇼핑몰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8. 서경한우 암소 브랜드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고객의 관점에서 브랜드가 발전되어 가야 합니다. 고객 관점에서 생산, 유통시스템이 구축되고 발빠르게 대응해야 브랜드가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에 서경한우의 ‘한우 숙성기술 활용 저지방 부위 부가가치 향상 시범사업’에 대한 식미 평가를 진행했다. “자체 건식숙성고에서 다양한 기간 숙성을 진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40일 건식숙성이 최상의 맛을 끌어낸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최상급 한우고기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2~3등급 저지방 한우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드라이에이징 기술을 활용한다면, 깊고 뛰어난 풍미를 더할 수 있기에 독자적인 상품성을 갖추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숙성(Aging) 이란 일정 기간 온도, 습도, 바람 등 숙성환경을 유지해 고기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는 기술로 숙성방법에 따라 건식과 습식으로 나뉩니다. 서경한우의 뛰어난 건식숙성기술에 40일의 기다림이 더해지면 2∼3등급의 저지방 한우고기도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특유의 풍미와 감칠맛이 향상됩니다. 우리 조합은 앞으로도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조건을 찾아 서경한우만의 기술을 만들어갈 것이며, 이를 통해 지역 한우농가의 소득 향상에도 기여하겠습니다.9. 어려운 경제속에서 직영 판매식당의 가격 할인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면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역경제는 날로 추락하고 있고 각종 공과금을 비롯하여 금리인상, 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감안해 서경한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최고품질의 암소 한우를 대폭 가격을 인하한 할인행사를 수시로 진행하고 있으며, 갈비탕, 곰탕, 육회비빕밥 등의 식사를 가격을 낮추어 7천원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합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서민들이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것이 서경한우의 경영철학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10. 주민들과 조합원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 ? 서경한우를 사랑해주시고 이용해주신 고객분들과 조합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더욱 발전되고 좋은 서비스로 함께하는 서경한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초대석
    • 초대석
    2023-04-26
  • 황순철 모가농협조합장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으로 발돋움시킬 터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조합원들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 최선의 노력 하는 조합장 될 터"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입니다.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히는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또한,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연재 하고 있는 바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과의 대담을 통해 황 조합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평가와 검증과 사회봉사자로 정평있는 현 모가농협 조합장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이사회와 모가농협의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신 소득 작목 발굴 지원해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 넓혀가도록 계획 농협 주인인 조합원 섬기며 실익과 권익보호 농가소득 극대화시켜 나갈터 1, 하나로신문 독자분들과 조합원을 위해서 간단한 인사를 전한다면?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 인사드립니다. 코로나19와 조류인플루엔자가 확산하여 발생되는 힘든 시기에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시는 모든 시민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2021년 새해에는 건강하게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2, 모가농협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조합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인구 4,500여명 정도의 모가면에 위치한 우리 농협은 1,350여명의 조합원님들과 22곳의 영농회로 구성되어 있는 소규모의 조합이지만 조합원님과 임직원 지역주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내실 있는 강소 농협으로 활발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모든 성과와 그에 따른 결과는 우리 조합원님들과 주민들의 협조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던 것같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 모가농협 조합원들을 위한 혜택 및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2020년 우리 모가농협은 조합원을 위하여 농협사업이용권 지급과 벼 수매가격 인상, 배추 모종 마스크 지원 고령조합원 의료비 일부 지원 및 장제비 지급 건강검진확대실시 농기계 순회 수리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신규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내실 있는 경영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조합원 실익증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할 예정에 있습니다. 많은 협조와 성원 부탁드립니다.4. 이천지역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역할과 운영방침 및 경영방침 계획에 대해 밝힌다면? 모가농협은 이천시의 중심지점에 위치하여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농협 이용률 등 경쟁력을 바탕으로 농업 농촌의 발전과 조합원의 소득향상을 꾀하고 있습니다. 내 외부 감사를 통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과 조합원의 무한만족을 위한 친절봉사 및 조합발전을 위한 임직원의 창의적인 업무추진 자세를 확립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가농협을 만들겠습니다.모가농협의 운영방침과 경영방침으로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을 섬기며 조합원들의 실익과 권익을 보호하며 농가소득을 극대화시켜 조합원 모두 삶의 질 높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조합원을 위한 목적 아래 투명한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임직원들의 능력과 취미 특기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업무능률을 최대한 극대화시켜 나가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고 누구나 수용 할 수 있는 공감경영을 실현시켜 나 갈 것 입니다. 5. 초선 모가농협 조합장으로서 재직하면서 그동안 업적과 추진 사항을 밝힌다면? 초선조합장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실익증진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최근 농어촌 발전 분야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컨설팅 최고경영자 선정 등 여러 종류의 상을 수상 하였습니다. 또한, 조합원들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모가농협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와 농가소득 창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앞으로도 가시적인 발전 효과를 일으키기 위하여 농협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6. 모가농협 그동안 추진 사항과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면? 금년에는 조합원님들을 위한 복지 실익 위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지원 건강검진 지원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볏짚환원사업을 펼쳤으며 앞으로 젊은 조합원을 위한 신 소득 작목을 발굴 지원하여 농산물 소득 범위 또한 점진적으로 넓혀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7, 현재 농민 조합원들로부터 산물 벼를 수매하고 있는데 수매가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소신을 밝혀 달라?해마다 벼 수매가는 생산 농가와 농협 간의 입장 차이가 생기고 갈등 발생의 원인이 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2020년에는 긴 장마와 일조량의 편차로 수확량이 전년 대비 감소한 상황에서 수매가격의 결정은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줄어든 생산량만큼 소득보존의 일환으로 수매가격을 인상하여 서로의 입장에 만족할 수 있는 수매가를 형성시켰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벼 수매가격 인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앞으로 임금님표 브랜드관리와 체계적인 판로구축과 유통에 대해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지표를 제시한다면?“ 예전에는 농산물 관련 브랜드를 자산적 개념이 아닌 농산품 이름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고 전문인력과 관리조직의 미흡 등으로 사후관리가 안 되어 브랜드화 효과가 저조하였지만, 임금님표의 철저한 브랜드관리를 통하여 생산 농산물에 대한 공통적인 품질관리 체계와 소비자 욕구에 맞는 다양한 포장 규격 및 감각적인 포장 디자인 개발 등 브랜드의 상품화 사후관리와 공동 홍보방안 마련 등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 등의 수립으로 현재까지는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지역과 상품의 인지도 명성도 생산의 지역적 유리성 특정기술도입 등의 여건을 고려해 세분화된 유형별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목표시장을 점차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9, 현재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역 대표적인 축제 취소와 지역경제가 침체 되고 있는데 그 해결 방안과 정책 방향 그리고 조합원들을 위한 대책을 밝힌다면? 농촌경제연구원의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농업의 공익적 기능 식량안보 귀농 귀촌 증가 등 농업 농촌의 중요성이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이제까지의 농촌관광이 가족 친화나, 미식 여행을 주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향후에는 농촌만이 제공할 수 있는 힐링 건강치유 심신 휴양 자연환경 및 생태환경체험 가족 친화 미식 여행 등의 여러 목적으로 세분화 및 확대 될 것으로 예측이 되어 추후 코로나19 종식 이후 농촌관광 수요 확대 및 마이크로 투어리즘 등 관광형태 변화에 대비하여 지자체에 농촌관광정책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추가로 지역경제 침체로 역경을 겪으시는 우리 조합원님들을 위하여 다양한 자금지원방안의 모색, 인력중개를 통한 인건비 절감 부가소득을 조성하기 위하여 작물 종자 및 모종 공급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10, 주민들과 조합원들에게 당부 및 부탁이 있다면?코로나19로 심리적,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느라 고생이 많으신 우리 농업인과 이천 시민여러분께 당부 말씀 올립니다. 2020년은 지난날의 평온한 하루 한주 한 달 일 년이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결속된 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언론에서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연일 보도하는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크시겠지만 개인 방역수칙과 지자체의 안내에 성실히 따라주셔서 우리 이천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겠습니다. 저 황순철 모가농협 조합장은 다가오는 2021년 신축년에는 농업인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모두가 만족하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조합장이 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모두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2021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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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3
  • 친정집 가난 극복을 위해 논 닷 마지기와 맞바꾼 장님남편 선택 결혼
    2019/11/21 12:50 입력 모범시민 발굴 시상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고 정주영회장의봉사정신 효행상수상 본문은 본지 신선재 칼럼위원이 故 정주영 회장이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거나 효행 및 가족사랑을 실천하여 사회의 귀감이 된 인사와 단체를 발굴 표창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제정된 명망 있는 상으로서 1문1답 식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ㅡ편집자 주ㅡ 1.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수상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저는 이 상이 대통령표창 이상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큰상을 받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삶을 살아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사회가 이를 인정해 준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하고 눈물이 납니다.저를 추천해준 이천향교에 감사하고 저 때문에 가슴에 응어리 졌을 어머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2.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친정 사정에 간단한 소개를 해 주십시오.저는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에서 1943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3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해가며 생계를 꾸려갔기에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문장초등학교를 입학졸업을 하였고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어보고 포기한 체 사회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며 생활해 왔습니다.3. 결혼을 하게 된 동기나 각오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제 나이 20살 되던 어느 날 시골의 고모부로부터 “인근동네 부잣집에 장님아들이 있는데 그 집으로 시집을 오면 논 닷 마지기를 준 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고모부를 졸라 댔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차라리 내가 물에 빠져 죽겠다”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하여 장님에게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당시 저는 가난이 너무 싫었고 친정도 살리고 또한 불상한 사람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고 보란 듯이 잘 살아보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4.결혼생활과 함께 그동안 가정생활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신다면? 1964년 12월 시집을 와보니 시댁은 비교적 부농으로 약7,000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농사가 기계화가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짓는 농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로 오죽하면 촌부자 일부자라고 일이 많았습니다. 식구로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을 비롯하여 환갑 된 시부모님 그리고 팔순의 시조부님이 계셨는데 시조부는 노환으로 치매까지 있으셨습니다. 3년여를 조석을 따로 차려 드리는 등 병수발을 들었고 1968년 시조부님이 돌아가시자 시어머님이 병을 얻어 몸져누우셨습니다.시어머니는 10여년을 해소 천식을 앓다 1979년에 돌아가셨고 이어서 이번에는 시아버님이 몸져누우셨고 아버님 역시 치매와 노환으로 15년간을 고생하시다 1995년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3년 친정어머님이 몸져누우셨습니다.나로 인한 평생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불쌍한 어머님을 편하게 보내드리리라 마음을 먹고 남편을 설득해 친정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마지막 3년 전부터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고생을 하시다 2017년 돌아가셨습니다.5.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결혼 한지 14개월 만에 첫 아들을 낳고 10여년간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다행이 모두 정상아로 태어나 감사하나 “아버지가 장님인지라 다른 애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학교 가는 자녀들을 뒤 따라 가는가 하면 몰래 교실을 훔쳐보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을 수시로 찾아가기도 하고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내 집처럼 드나 들다보니 교장선생님께서 “부교사로 임명 해야겠다”며 1979년 어머니회장을 맡겨 그로부터 중학교까지 13년간 자모회 활동을 하였습니다.6. 바쁜 생활 속에서도 시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하던데요?1969년부터 10여년간 이천군 생활개선회장을 비롯해 79년부터는 새마을부녀회장 10여년을 맡으면서 농촌부엌과 화장실개량 꽃밭, 꽃길 가꾸기 등 농촌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절미운동과 부녀회 공동밭 가꾸기 등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고 여기서 발생한 기금으로 마을 어르신들께 수시로 (고유 명절이나 어버이날, 삼복 날 등) 식사를 대접하고 매년 효도관광을 시켜드리는 등 내 부모 모시듯 보살폈습니다.이밖에도 초, 중학교 어머니회장 13년, 자유총연맹 백사여성회장4년, 성균관 유도회 백사여성회장4년 등 40여년 간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했습니다.7. 농사가 많은데다 앞 못 보는 남편은 일을 못하고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네요?1964년 시집왔을 때만 해도 시부모님과 같이 손 모내기 손 벼 베기 등 재래식 농업으로 부모님을 도와가며 농사를 지었으나 농촌도 기계화가 되고 부모님이 일을 못하시게 되자 여자의 몸이지만 농기계 작동 법을 배워 77년부터는 손수 경운기로 두엄을 나르고, 논을 갈고, 써리고, 이앙기 탈곡기 등 기계화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가하면 담배, 고추 등 특용작물 재배, 양돈 등 안 해본 농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건강이 있었기에 가능 했던 것 같습니다.8. 힘든 삶을 살다 보면 초심을 잃고 후회도 했을 텐 데 이를 극복 할 수 있었던 비결은?저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가난에서 벗어나자! 불쌍한 남편을 살리자! 남에게 손가락 받지 말고 살자! 내가 택한 길 올바르게 남보란 듯이 살아보리라! 라는 신조로 살아 왔는데 끝까지 이를 지키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앞을 못 보는 장님의 특성이 남을 의심 하는 것이라 합니다.(특히 배우자) 어떤 때는 집안일을 팽개치고 사회활동을 위해 밖으로 나올 때는 마누라가 못마땅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고 격려해준 남편 덕에 감내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9. 그동안 생활을 해 오면서 감사와 전할 말이 있으시다면?첫째, 무엇보다도 내 옆에서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준 남편에게 감사하고요, 둘째,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자녀로 남들에게 따돌림 받고 자격지심이 있었을 텐 데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감사하고, 셋째, 평산 신씨의 며느리로, 집안으로, 이웃으로, 받아주고 위로 격려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계신 조읍1리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끝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며 타의 귀감이 되는 모범시민을 발굴해 시상해주는 희망의 등불인 아산재단과 저를 선정해 주신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류형복 기자가 만난사람 양강숙 사랑의요양원 원장
    2017/11/07 11:00 입력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 여가프로그램 개발 운영 사랑의요양원 원장 양강숙 사회복지사로써 요양원을 운영하게된 계기는?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와 삶의 질 높은 사랑의요양원 운영가을의 마지막 11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게 흘러 벌써 마지막 가을을 맞이하고 얼마 안 있으면 한해의 마지막까지 맞이하게 된다고 하니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저는 안산시 고잔동에서 사랑의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양강숙 입니다.요양원에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즐겁고 행복함을 느꼈기에 요양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현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 봉사활동내역을 소개를 한다면? 지난 8월 23일 사랑의 요양원과 밀리아나 경로당이 자매결연 협약 식을 가졌습니다.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갖게 된 어르신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지역사회에 계신 어르신들에게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자매결연을 추진 체결하여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앞으로 밀리아나 경로당에 쌀을 정기적으로 후원할 예정이며 이에 그치지 않고 경로당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약속했습니다.더욱이 노인의 날 지역 어르신들 모시고 식사 대접해 드리는 자리에 참여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앞으로도 꾸준히 할 생각이며 시간이 허락되면 생활이 어렵거나 독거노인 분들께 도시락 배달도 계속 참여할 생각입니다. 사랑의요양원의 조직과 구성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은 19인 시설로 현재 어르신 19분이 생활을 하고 계시며 시설 규모는 생활실 6개 프로그램 실 물리치료실을 완비 어르신들의 체력과 기능을 향상 유지시키는데 힘쓰고 있으며 종사자들은 시설장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8명 조리원 2명이 위생 신체활동 정서적인 지원을 하며 어르신들의 팔 다리가 되어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역 생활에 느낀 장, 단점과 원장의 역할에 대해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현재 우리나라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과 의료기술로 인하여 수명이 연장 되면서 노인인구는 급속히 증가되는 반면 젊은 세대들의 결혼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맞벌이 부부들이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자녀 출산에 대해 각종 양육비와 교육비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출산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 인구의 남녀노소 균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우리의 현실은 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제가 생활을 하고 있는 안산시 역시 예외가 아닌 노인 인구가 매우 많이 있는 가운데 도시락 배달을 하며 같은 건물과 인근에 누구는 지원을 받고 누군가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습니다. 이런 경우는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도시락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별적인 복지라 하여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더욱 지원이 필요한 분들이 먼저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몰라서 신청을 못하시는 분들도 많고 갑작스럽게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지원이 필요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노인뿐 아니라 소외계층 모두가 혜택을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설을 운영하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은 어르신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제공하고 생활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어르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능을 유지하고 발굴하여 향상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과정은 모두가 힘들지만 어르신이 점점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모두가 기뻐하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사랑의요양원 원장직책을 맡고 있는데 앞으로의 운영계획과 방침을 밝힌다면?저희 사랑의 요양원은 무엇보다 불편한 노인 분들을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 되어 입소 노인 분들하고 임직원들이 일거수일투족 혼연일체가 되어 항상 즐거운 웃음과 함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어 높은 삶의 질을 만끽하시면서 편안한 생활과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설립이념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소 노인 분들을 위한 치매예방을 위해 음악 미술 작업치료 웃음치료 등의 전문적인 치매예방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 하고 있습니다.또한 건강한 육체와 마음에서 건전한 생각을 갖고 생활을 할 수 있듯이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체조 수건체조 등 입소 노인 분들에 개별적으로 맞춤형 운동을 실시하는 신체기능강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풍요로운 여가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래교실 문화공연 윷놀이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가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고 특히 사회적응훈련프로그램으로 예배 이, 미용 생신잔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을 느꼈던 사례를 간단히 소개한다면?저희 사랑의요양원에 부부가 입소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치매 증상으로 우울증과 폭언이 심하셨습니다. 우울감이 심한 날은 식사도 거르고 힘없이 누워만 계셔서 항상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걱정도 많이 하시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저희는 할머니가 식사를 거르시면 죽을 드리고, 간식을 여러 번 제공하였고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가 가까운 시장에 모시고 가고 산책을 시켜 드리며 정서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셔서 폭언을 하는 날도 잦아들었고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아지셔서 부부가 함께 퇴소를 하셨습니다. 어르신들과 정이 많이 들었었지만 이때가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문제점과, 애로사항 있다면 소개를 해 달라? 요양보호사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직업입니다. 요양보호사들은 어르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우대하기 위해 힘쓰지만, 어르신이나 보호자들은 요양보호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은 아줌마라고 부르며 인격을 무시하고 사기를 격하시키며 자신들만이 만족 할 수 있는 시중과 서비스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인식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양보호사들도 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고 더 나아가 다른 어르신에게 피해가 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호간에 인격 존중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요양원에 대한 인식제고와 근본대책을 제시한다면?과거에 몇몇 안 좋은 요양기관들이 TV에 방영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양원이란 곳은 비인격적이며 문제와 비리가 많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관할 시·구청·보건복지부 국민보험공단에서 요양원에 대해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관에서는 지속적인 내부 교육을 통해 종사자의 전문성을 강화시키고 어르신들에게 최상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회의와 고민을 끊임없이 하며 실무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많은 요양원이 투명성 있고 바른 운영을 하며 인식 제고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양원에 대한 색안경을 벗어주시고 열린 마음으로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흙과불 도공의 혼 삼위일체 도자기 예술품
    로원도예 권태영 작가의 투각 청자 도자기에 혼을 넣는다. 이천을 대표로 하는 원적산 줄기에 이어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원적로 133번길115에 위치한 로원도예(度希 권태영)가 조그마한 안내 간판만 우뚝 서 있는 가운데 예술감각이 숨쉬고 있는 로원도예 공방이 차지하고 있다. 도예공방에 들어서는 순간 벽에 걸려있는 낯익은 듯 한 외국인이 투각청자를 한국인에게 받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은 다름 아닌 미국 카터 대통령과 연세중앙교회 윤석전담임목사님이 나란히 서있고 그 아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청자 작품에 무언가의 글씨와 함께 자리매김 하고 있는 우화하고 청빈한 자태의 예술작품은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대통령에게 목사님이 전달한 로원도예 度希 권태영선생 작품이다.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과의 만남 도희(度希)권대영 선생은 약 10여년전에 한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서성이다 공방으로 들어서면서 당시 전시장에 전시중인 청자 한 점을 가르치면서 가격을 물어와 100만원이라고 말하자 10점이 필요하니 가격을 싸게 해 달라고 요구해 1점당 10만씩을 깍아주겠다고 하니까 제작기간을 6개월로 하고 빳빳한 수표 2장을 계약금으로 내놓고 돌아가 반신반의 끝에 6개월의 납품기간을 약속하고 제작 작업에 돌입하였다. ▣청자투각작품이 마침내 백악관과 청와대에 입성하다. 하지만 뒤이어 도자기에 들어갈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어 자칫 실수를 우려 곧바로 전사업체에 의뢰하여 영문도 모르고 작품 활동에 심혈을 다해 제작 납품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뒤늦게 알게된 사실은 미국 백악관에 카터 대통령외 유명인사들에게 자신의 제품이 선물로 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를 계기로 인연이 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청와대 이명박대통령 재임시절에 청자작품이 납품하였고 뒤 이에 박근혜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청자작품을 선물용으로 3점을 완성 2점을 전달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나머지 1점은 가보로 소장하고 있으며 항상 목사님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힌다. 박근혜대통령소장 도자기문구는 “선진들의 땀과 피로 세운 대한민국 배경 삼으시고 솔로몬의 큰 지혜로 국민통합이루시고 무궁화 꽃 활짝핀 통일나라이루소서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연세중앙교회 담임목사 윤석전” ▣흙이 좋고 먹고 살기위한 작품 활동이 도자기 예술로 승화 度希권대영선생은 일찍이 도자기의 마을인 신둔면 남정리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부터 늘 가깝게 할 수 있는 흙으로 인해 흙과 친해졌고 이어서 먹고 살기위해 흙을 이용한 도자기 작품에 심취하여 무작정 도자기업종에 젊음을 받치며 나름대로 자신만이 독특한 작품을 예술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연구 개발에 몰두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도자기는 오묘한 흙과 불 도공의 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비의 세계 도자기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도공의 피나는 노력과 예술성 감각과 정성을 다한 혼을 작품에 불어 넣을 때만이 흙과 불의 오묘한 조화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도자기의 작품이 탄생한다는 신념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상업욕심에 의해 대량생산으로 작품을 생각한다면 이는 예술품이 아닌 단지 상품의 역할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항상 도자기 작업을 하기위한 마음가짐 을 위해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해 순수한 자연의 섭리와 함께 최선을 다한 정성으로 내 자신이 예술품에 살아있는 혼을 불어 넣는다는 신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자기는 양질의 재료와 함께 좋은 형태를 만드는 성형이 중요합니다. 형태가 나와야 형태에 따라 무슨 문양과 음각 양각을 넣을 것인가 결정이 되며 아울러 청자의 멋은 색 형태 조각으로 비취색이라 하는 신비스러운 색에서 우러나는 품위와 형태의 오명한 각선미가튼 신비함과 오묘함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상감청자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작품의 고급화를 위해 이중투각 작품에 심취하여 짧게는 한 점에 1주일 길게는 2개월에서 3-4개월 걸리는 작품도 있고 좀 더 특색 있는 작품을 하려하면 재료를 제때 구하지 못해 6개월 1년을 걸리는 경우도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귀 뜸 한다. ▣비로소 도자기 도공으로 인정받다. 어린시절부터 흙을 좋아했고 더불어 생활을 하다보니 도자기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80년도에 토정 홍재표선생님께 물레수업을 사사받았고 형태와 선에 대해 국민대 김익영교수님 지도아래 배웠고 유약은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를 수료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1980년도 도예입문하여 1988년제10회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출품 1989년롯데백화점3회개인전 1990년동경전시회 1993년 전국민예품전시회출품 1995년10월 마침내 로원요를 설립하여 2015년2월26일 한국예술문화 전통도예투각명인으로 한국예총명인협회로 부터 인증을 받았다. 2008년12월25일부터 29일 일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전시 2009년 5월17일 제10회 클레이올림픽입선 9월23일부터28일 인사동서울미술관 전시전 12월 대한민국녹청자 현대도예 공모전입선 제14회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입선 2010년 제15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1년제3회목포 도자기전국공모전 특선 2012년제17회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특선 2013년 4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서울경인미술관전시 2013년 제5회목포도자기전국대전 입선 2014년5월 제2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대상 제35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특별상2015년4월경기도기능경기대회은메달을 획득하였다./강민선기자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손끝으로 빚어내는 한국의 얼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 수상 도예인 자긍심과 2013/05/13 18:06 입력도천 서광윤 '서광윤요'대표 활활 타오르는 진홍빛의 강렬한 불꽃! 그 엄청난 온도 속에서 오늘도 한국 전통자기의 탄생을 알리는 생명의 소리가 도공의 인고의 열정과 함께 고고한 자태로 익어가며 서광윤 도예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이처럼 그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은 흙에서 도예가의 예술혼과 함께 결을 따라 빚어져 자기로 재탄생 되며, 15세 소년 서광윤 그의 가슴도 뜨겁게 매료시켜 지금의 도예가로 탄생시켰다.1970년 25세의 나이로 지순택요에 입문하여 10여 년 간의 배움의 열정으로 도림서원 성형장으로 6년, 신정희요 성형장으로 10년간의 도예인 으로서 입지를 다지며 1996년 지금의 이천시 신둔면 마교리에 위치한 서광윤요를 설립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한국 전통 도자의 숭고한 맥을 이어오고 있다.한 덩이의 흙은 서 대표의 손길을 따라 물결처럼 흐르고 성난 파도와 같이 한 획을 이루는가 하면 때로는 잔잔한 호수와 같이 고요히 흐르며, 그의 매만짐 속에 절제와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도자로 피어나 솔 향을 머금을 장작가마 속 불꽃을 통해 영롱한 백자로, 한 점 한 점 차별화된 무늬의 매력을 지닌 진사로, 소박해보이지만 정갈하고 절제미가 있는 분청으로 물레질부터 성형, 조각, 유약 바르기, 장작가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옛 전통방식으로 제작하고 잇다.특히 전통 장작가마 방식은 소나무 장작으로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가마에 불을 지펴 1300도가 넘는 고온으로 한국도자의 견고함과 장인의 고집으로 더욱 차별화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도자를 제작하는데 핵심적이다. 겉모습을 비슷하게 모방 할 수 있겠지만, 장인의 손에서 더해지는 변치 않는 도자의 가치는 시중에 유통되는 일부 도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을 이어가는 서 대표 만의 예술혼이 서려 있다.옛 전통을 이어감에 있어서 “요즘은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지만, 대중의 관심은 생활자기를 비롯한 호기심에 그치고 있지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람은 없다.” 라는 서 대표의 말속에 대중들은 며칠간 이뤄지는 축제의 퍼포먼스 처럼 여겨 소중한 우리 전통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한편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서 대표는 전통을 지키면서 도자의 가치를 알리고자 더욱 다양한 작품활동과 대중과의 소통으로 연구 노력하는 가운데 지난 29일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한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전통 도예발전 공로에 있어서 대한민국 평화예술대전 국회의장상과 한국석봉미술협회 대상 등을 수상해 도예인으로서 자긍심과 위상을 드 높였다.또한, 일본 후쿠오카시 엘라홀 갤러리전과 장애인돕기 대구문화예술회관전, 장애우권익보호기금마련을 위한 도예장인전등 나눔을 통한 그의 행보는 도예발전에 기여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앞으로도 서 대표는 아내, 자녀와 함께 꾸려가는 서광윤요를 “힘든 와중에도 조용히 도움을 주는 터전으로, 실력과 자부심을 가진 전통도예의 뿌리깊은 계승자로, 나아가 세계인의 중심에 선 도예장인으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 전하며 “조금더 밝아질 도자미래는 애호가 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도자미래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 초대석
    • 향기나는사람
    2021-01-03

실시간 초대석 기사

  • 특전사의 투지로 전신마비를 극복한 영원한 군인
    이계찬 주필이 만나는 향기 나는 사람 38. 항공작전사령부 전 헬기 조종사 지호영 준위(45)특전사 백전불굴의 투지로 전신마비를 극복한 영원한 군인“적에게 공포를 주고 국민에게는 사랑과 신뢰를 받는 특전정신”부상으로 전역했으나 국민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주는 특전정신으로 살아갈 터!장애인합창단원으로 장애인들에게 힘을 주고, 장애인 공동체를 설립키 위해 사회복지학 박사에 도전하는 불굴의 사나이2007년 1월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헬기조종사였으며 생존교관이었던 지호영준위는 이천의 마리나 수영장에서 항작사 헬기조종사들에게 수영을 지도하고 있었다.헬기조종사들은 수영이 능숙해야 해상비행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에 동료조종사들에게 수영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특전사에서 강한 훈련을 받은 지 준위는 늘 모든 훈련에서 모범을 보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매 훈련마다 실전처럼 임하던 그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수영훈련 중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사고로 전신이 마비돼는 사고가 난 것 이었다.사고로 물속에 잠겨 의식을 잃었던 당시, 그 짧은 사이 그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신비한 광채를 뒤로한 채, 모르는 두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형체가 없었다. 지 준위는 그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사라졌다.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근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을 물속에서 발견하고 들어올렸다. 지 준위는 머리를 수영장 바닥에 강하게 부딪힌 후 온몸에 전신마비가 왔다. 2개월 동안 분당차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 후 10개월간 국군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처음 2주간은 식물인간 상태였다. 무의식상태에서 신비한 체험들을 하게 되었다.“이런 체험들을 한 후 저는 사후세계를 믿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경험을 했지요. 하나는 모르는 목사님이 아이들과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이 떠올랐어요.둘째는 어머니가 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고요.셋째는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는 여인이 보였습니다. “-세 가지의 체험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으셨나요?“나중에 제가 일반병실로 옮겨졌을 때 알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나가던 주사랑 교회목사님이 문병을 오셨는데 ‘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파 아이들과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아이들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 기도는 힘이 있다.’라고 하셔서 그분인줄 알았고.두 번째는 어머니께서 평소에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였었다.세 번째 체험은 역시 일반병실에 있을 때 조병돈 시장 사모께서 문병을 와 “평소에 당신의 당신과 아내가 불우이웃 봉사를 많이 하던 분이라 사고소식을 듣고 성당에서 기도했었노라‘시며 묵주를 주고 가셨다. 그래서 그분인줄 알았다. 이러한 체험들을 하고 나서는 사후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믿게 되었다.” 육군 중사출신의 아내(고순애,42)는 그의 진실한 동반자였다. 매일 3차례의 고된 전신 마사지와 병수발을 하며 두 자녀를 키우고 부모님을 모시는 아내에게서 그는 많은 힘을 얻었다.아내는 부상 전에는 이천시의 어려운곳을 보듬는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었다. 그녀는 부상 후에도 밝은 모습으로 집안에 닥친 불행을 극복하는데 군인정신을 발휘하였다. “부상과 함께 찾아온 우울증과의 힘들었던 싸움“이러한 아내의 내조에도 불구, 환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큰 우울증이 찾아왔다.퇴역 후 국군 통합병원 입원치료 중에 자신이 실패자로 격하되었음(?)을 실감했다.군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자 병원 내에서 바로 신분, 호칭이 달라졌다.간호사나 의사, 직원들의 호칭이 준위님에서 000환자로 바뀌었다.아는 분들은 준위호칭을 써줬으나 대다수 모르는 이들이 부르는 호칭과 대우가 너무 극복하기에 힘이 들어 2개월 만에 급히 집으로 퇴원하게 되었다.평생을 아끼던 군부대를 들어갈 때에도 전에는 부하들의 인사를 받고 들어갔으나 이제는 입구에서부터 출입신청서를 작성 제출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처지가 힘이 들었다.집에서 겨우 오른쪽 앞발만 움직일 수 있고 양팔, 왼발, 온몸을 사용할 수 없었다.평일에 할 일이 없고, 갈 곳이 없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외출을 하면 0.5cm의 작은 장애물에도 나동그라졌고, 외모가 멀쩡해 보이는 자신이 길을 건널 때, 걸음이 느린 것을 보고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재촉 할 때면 식은땀이 나고 외출이 두려웠다.수시로 하늘을 주름잡던 옛 시절이 떠올라 괴로웠다. 아내가 남의 집 김장 담가주는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어느 날 그는 아이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후 큰 좌절과 절망감을 느꼈었다. 병원 투병 중 가족들의 격려와 사랑의 힘을 절실히 느꼈던 그는 퇴원하면 아내와 자녀들에게 정말 잘해주어야지 하는 결심을 굳혔었던 그였다. 그런 자신에 실망한 그는 죽고파서 설봉 호숫가를 찾은 적도 있었다.얼음이 얼고 눈이 덮여 빠져도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되돌아 왔다.“내가 절망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2가지 원인은, 부모님보다 먼저 죽으면 그보다 더한 불효가 없고 또 하나는 병원에서 나보다 더 큰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보고 용기를 얻은 덕분 이었던 것 같아요.”“장애인들을 위한 정책제안을 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파”“군인은 항상 전투를 한다. 전에는 나라를 위해 적과의 싸움을 준비했지만 이제는 패배의식에 빠져드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내속에 있는 패배의식을 물리치고 제자신이 특전사 구호대로 적에게 공포를 주고 국민으로부터는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제 목표다.퇴역했지만 저는 군에서 배운 특전 정신을 살려 사회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기위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에도 사회봉사에 많이 참여하신다고“3년 전부터 이천시 장애인 합창단에 참여해 테너와 홍보기획부장을 맡고 있다.나금옥 합창단장님이 45명의 장애 합창단원들에게 힘이 되어달라고 하셔서 함께하고 있다. 저 뿐 아니라 나단장님은 10년째 장애인 합창단을 키우기 위해 성남을 주말마다 오가는 기러기엄마 역할을 자처하며 고생하고 계시고 군포에서 오시는 김이나 성악가(소프라노)님도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기 위해 오셔서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신다. 이런 분들의 희생어린 노력덕분에 2009년 전국 장애인 합창대회에서 대상, 2010년 경기도 대회에서 최우수상, 그리고 올해 경기도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1만 이천 장애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있다는데 자부 감을 느끼고 있다.지 준위, 그는 어려운 이들이 서로모여 의지하고 살 수 있는 가족쉼터를 구상하고 있다.부족함을 느끼는 이들이 서로 모여 살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공동체 마을이다.하나의 정원을 공유하며 간호사가 상주하고…….그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들여 재활에 전념하며 부단히 공부하고 있다.1급 심리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하였고, 여성부 양성평등 전문강사자격과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서울 사이버 대학 사회 복지과를 졸업한 그는 내년 6월 경원대 사회복지사 석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박사과정까지 마쳐 장애인들을 위한 국가, 사회에 대안을 제안하여 장애인들을 돕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지 준위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 초대석
    2011-11-22
  • 김덕수양평군의회의원
    김덕수 양평군의회의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 저에게 있어 양평은 처음과 끝입니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이 있듯 태를 버린 곳이 양평이었고 또 지금처럼 제 삶의 마지막 또한 이 땅이기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입니다.제 이력서가 말해주듯 대학교 졸업 후 오랜 기간 대구에서 섬유제조업을 하며 도전과 성취의 길만을 달려 왔습니다. 앞만 보며 달려온 힘든 역경의 시간들을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답게 반겨 주었습니다. 양평의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에서 두 물머리의 한강 물길까지도 저에겐 소중함이고 꿈이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국수중, 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대한민국 R.O.T.C 장교 중위 전역. (주) 예일 대표이사. (주) 광장 대표이사. 양평군 61연합회 회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원우회장. 제5대 양평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현 양평군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양평군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현 양평군의회 무소속의원으로 재직중인 김덕수의원. 2001년도에 고향에 와서 본 양평의 모습은 변화의 모습은커녕 암울했습니다. 각종규제로 지역개발을 못하고 재정자립도가 경기도 최하위로 군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매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민이 먹고사는 문제해결의 근본을 찾기 보다는 임시방편의 선심성 행정의 눈가림이 양평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의원이 목표는 아니었지만 시작은 될 수 있을 꺼라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 것이 군 의원 도전이었기에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원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중첩 규제인 수도권정비계획법, 환경정책기본법, 한강수계상수원 수질개선법, 수도법, 군사시설보호법등에 의해 4년제 종합대학 설립이 안 되고 제조업 공장이 제한을 받아 고용창출이 안 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양평에 집을 지으려면 전 가족이 6개월 거주를 해야 하며 97년도 이후 분할된 토지에 대하여는 1인이 1번 밖에 건축행위를 할 수 없어 양평에는 거주이전에 자유가 박탈되어 인구유입이 안되고 내 재산권마저 유린당해 개발행위를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저는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굳은 의지를 밝힌다.<관련기사4면계속>김덕수 양평군의회 의원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본지 하나로신문 정봉영 발행인과 김덕수 양평군의회 의원(무소속:양평읍 양서면 서종면) 대담을 통해 김덕수의원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의정능력평가와 검증 양평군 의회와 양평군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있어 양평은 처음과 끝입니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이 있듯 태를 버린 곳이 양평이었고 또 지금처럼 제 삶의 마지막 또한 이 땅이기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입니다.제 이력서가 말해주듯 대학교 졸업 후 오랜 기간 대구에서 섬유제조업을 하며 도전과 성취의 길만을 달려 왔습니다. 앞만 보며 달려온 힘든 역경의 시간들을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답게 반겨 주었습니다. 양평의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에서 두 물머리의 한강 물길까지도 저에겐 소중함이고 꿈이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국수중, 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대한민국 R.O.T.C 장교 중위 전역. (주) 예일 대표이사. (주) 광장 대표이사. 양평군 61연합회 회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원우회장. 제5대 양평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현 양평군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양평군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현 양평군의회 무소속의원으로 재직중인 김덕수입니다. 2, 경영일선에서 사업가로 발판을 굳혔는데 불구하고 양평군의회 2선의원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취지에 대한 설명 소개를 한다면? 2001년도에 고향에 와서 본 양평의 모습은 변화의 모습은커녕 암울했습니다. 각종규제로 지역개발을 못하고 재정자립도가 경기도 최하위로 군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매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민이 먹고사는 문제해결의 근본을 찾기 보다는 임시방편의 선심성 행정의 눈가림이 양평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의원이 목표는 아니었지만 시작은 될 수 있을 꺼라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 것이 군 의원 도전이었습니다. 3, 양평군의회 유일한 2선의원으로써 양평군정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군민들의 불만은 그 도를 넘고 있습니다. 군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투명하게 공개하고 먼저 알려서 군민을 위한 정책이 되도록 해야 하며 군민의 의견을 추상같이 받들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의입니다. 아직도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평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개혁을 하지 못하면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원이든 군수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자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놓치면 군민들로부터 개혁을 당하는 일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4, 지난 3월 세종로 중앙청사 앞에는 삭발을 하고 “위법행정이 세금 낭비를 부추키고 있다”며 진눈개비를 맞으며 1인 시위를 펼쳤는데 간단한 설명을 해 달라? 양평군 위법행정의 잘못됨을 여러차레 경고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힘의 논리에 밀려 결국 1인 시위를 하게 되었고 양평의 혈세낭비 사업에 대해 중앙일보 5월 6,7,9일자에서 양평의 위법행정과 세금낭비 사업에 대하여 감사원도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질 타 했으나 전혀 시정되지 않아 이러한 무소불위의 지방권력에 제동을 걸고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지금 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군민들의 불만은 그 도를 넘고 있습니다. 군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투명하게 공개하고 먼저 알려서 군민을 위한 정책이 되도록 해야 하며 군민의 의견을 추상같이 받들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의입니다. 아직도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평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개혁을 하지 못하면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원이든 군수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자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놓치면 군민들로부터 개혁을 당하는 일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5,김덕수의원이 행전안전부와 청와대 1인 삭발 단식 시위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우리 군과 같이 재정이 열악한 지방단체 일수록 군민의 피와 땀으로 모아진 혈세를 단돈 1원이라도 법과 원칙에 따라 효율적이고 계획적으로 사용해야합니다. 경기도 31개 시 군중 양평군은 12개 읍면에 인조, 천연잔디구장 등 수십개의 종목별 체육시설이 가장 잘 조성 되어 있습니다. 양평군이 종합운동장을 추진하면서 의회가 예산을 승인해줘도 군민여론조사를 통해 군민이 50%이상 지지할 때 추진하고 50%가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던 의회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일방적이고 의도적이고 공무원이 작성한 행정전횡적인 유도설문내용으로 여론조사를 했고 여론조사 결과로 사업추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전에 부지매입을 먼저 해 어처구니없는 행정으로 군민을 우롱했습니다. 종합운동장을 추진하면서 공유재산관리계획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행안부와 법제처의 공식답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종합운동장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업이라면 왜 법과 원칙대로 진행하지 않습니까? 왜 군민 앞에 떳떳하고 올바른 여론조사를 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어기며 의회를 무시하고 강행하며 수백억을 빚까지 내가며 강행하는지 백운테마파크 사업은 군민과 의회의 끊임없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도로도 확보 안 된 채 100억여 원을 집행했고 테마파크에 테마도 없이 예산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오빈역사에 123억 7000만원을 빗으로 건설하고도 모자라 운영적자를 양평군이 부담하는 굴욕적 불평등 계약에 의해 매년 수억원씩 운영적자를 부담해야하며 최장 30년까지 지불하는 철도공사와의 계약으로 혈세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데 지방행정을 감시하라는 준엄한 명령과 함께 군민이 직접 달아준 군의회 의원의 배지 앞에서 잘못된 행정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지방행정개혁을 요구하면서 삭발과 단식을 하며 정부청사 청와대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한 것이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해도 가슴속 열정만큼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삭발과 단식을 통해 국민의 바램을 관계 실무자에게 전달했고 지방자치제도의 문제점의 개선을 위한 제도개혁을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그 이후 맹형규 장관은 지자체 투융자심사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예산낭비성 사업은 착수하지 못하도록 할 것, 단체장에 대한 횡령, 뇌물, 에 따른 보궐선거비용 본인 책임 등 단체장에 대한 권한 감시권 확대 방침발표를 한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감사를 드리며 철저한 제도적 보완을 통한 강력하고도 시급히 시행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말씀해 주신다면? 진정으로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중첩 규제인 수도권정비계획법, 환경정책기본법, 한강수계상수원 수질개선법, 수도법, 군사시설보호법등에 의해 4년제 종합대학 설립이 안 되고 제조업 공장이 제한을 받아 고용창출이 안 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양평에 집을 지으려면 전 가족이 6개월 거주를 해야 하며 97년도 이후 분할된 토지에 대하여는 1인이 1번 밖에 건축행위를 할 수 없어 양평에는 거주이전에 자유가 박탈되어 인구유입이 안되고 내 재산권마저 유린당해 개발행위를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저는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하수종말처리장을 국비로 지원 받아 건립되었지만 2010.9.30에 하수도정비기본계획 승인이 총사업비 900여억원 중 700여억원을 원인자 부담으로 승인 받아 양평군 재정으로 700여억을 부담해야 하는 막대한 재정난 때문에 착공조차 못하고 있어 향후 도시개발계획에 차질이 있어 이대로는 양평시가 될 수 없어 원인자 부담은 국비 지원으로 시급히 개선 시켜야 합니다. 더불어 없던 오빈역도 100% 군비로 설치한 양평군이 수십년 동안 운영해 왔던 석불역, 매곡역 운영을 안 하겠다는 중앙정부의 정책과 횡포에 놀아나는 현실은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고 소외된 주민들의 삶의 기본권을 위해 반드시 두 역 운영은 기존대로 운영되어야만 합니다. 7, 김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느낀 군정의 지표와 해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양평군의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것을 감안하지 않는 방만한 혈세사업의 개선을 촉구 하면서 군민들의 참여와 뜻을 받들어 발전적인 사업을 이끌어 양평군을 대한민국의 최고의 도시로 발돋움시켜 가야 하는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둘째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바 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언제까지 규제만 운운하며 스스로의 개혁은 중앙정부 탓만 하며 뒷전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이란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내어 새살이 돋아나오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양평군의 새 희망이 보이고 100년 양평의 새로운 전통을 이어 갈 더 큰 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문화, 공연, 예술, 친환경농업 등 다양하고 공격적인 공공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양평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평군정은 미래를 내다보는 아래로부터의 행정개혁을 해야 합니다. 넷째 밀실행정을 청산하고 공개행정, 투명행정을 펼쳐 민의를 받들라고 만든 것이 풀뿌리 지방자치인 만큼 행정과 정책의 투명한 공개만이 양평군정이 한발 더 앞서나가는 지름길입니다. 8, 끝으로 양평군민과 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10만여 양평군민의 양평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사명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하며 바른 의정을 하겠다는 것을 군민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양평의 미래를 더욱 희망차게 지키기 위해 저 김덕수는 한 알의 씨앗을 심겠습니다. ‘군정은 군민의 것이며 행정은 오직 군민을 향해야 한다’ 는 것이 저 김덕수의 신념이기에 양평군의 미래를 위해 불법적인 행태를 뿌리 뽑고 중앙정부의 규제에 맞서 양평군민 모두 하나가 되어 승리하고 쟁취해야 할 것입니다.
    • 초대석
    2011-11-20
  • 김덕수양평군의회의원
    김덕수 양평군의회의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 저에게 있어 양평은 처음과 끝입니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이 있듯 태를 버린 곳이 양평이었고 또 지금처럼 제 삶의 마지막 또한 이 땅이기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입니다.제 이력서가 말해주듯 대학교 졸업 후 오랜 기간 대구에서 섬유제조업을 하며 도전과 성취의 길만을 달려 왔습니다. 앞만 보며 달려온 힘든 역경의 시간들을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답게 반겨 주었습니다. 양평의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에서 두 물머리의 한강 물길까지도 저에겐 소중함이고 꿈이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국수중, 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대한민국 R.O.T.C 장교 중위 전역. (주) 예일 대표이사. (주) 광장 대표이사. 양평군 61연합회 회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원우회장. 제5대 양평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현 양평군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양평군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현 양평군의회 무소속의원으로 재직중인 김덕수의원. 2001년도에 고향에 와서 본 양평의 모습은 변화의 모습은커녕 암울했습니다. 각종규제로 지역개발을 못하고 재정자립도가 경기도 최하위로 군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매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민이 먹고사는 문제해결의 근본을 찾기 보다는 임시방편의 선심성 행정의 눈가림이 양평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의원이 목표는 아니었지만 시작은 될 수 있을 꺼라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 것이 군 의원 도전이었기에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원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중첩 규제인 수도권정비계획법, 환경정책기본법, 한강수계상수원 수질개선법, 수도법, 군사시설보호법등에 의해 4년제 종합대학 설립이 안 되고 제조업 공장이 제한을 받아 고용창출이 안 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양평에 집을 지으려면 전 가족이 6개월 거주를 해야 하며 97년도 이후 분할된 토지에 대하여는 1인이 1번 밖에 건축행위를 할 수 없어 양평에는 거주이전에 자유가 박탈되어 인구유입이 안되고 내 재산권마저 유린당해 개발행위를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저는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굳은 의지를 밝힌다.<관련기사4면계속>김덕수 양평군의회 의원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로 본지 하나로신문 정봉영 발행인과 김덕수 양평군의회 의원(무소속:양평읍 양서면 서종면) 대담을 통해 김덕수의원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의정능력평가와 검증 양평군 의회와 양평군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있어 양평은 처음과 끝입니다. 누구나 태어난 고향이 있듯 태를 버린 곳이 양평이었고 또 지금처럼 제 삶의 마지막 또한 이 땅이기에 양평은 제 인생의 처음과 끝이라 할 것입니다.제 이력서가 말해주듯 대학교 졸업 후 오랜 기간 대구에서 섬유제조업을 하며 도전과 성취의 길만을 달려 왔습니다. 앞만 보며 달려온 힘든 역경의 시간들을 고향은 언제나 포근하고 정답게 반겨 주었습니다. 양평의 풀 한포기 돌맹이 하나에서 두 물머리의 한강 물길까지도 저에겐 소중함이고 꿈이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국수중, 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대한민국 R.O.T.C 장교 중위 전역. (주) 예일 대표이사. (주) 광장 대표이사. 양평군 61연합회 회장.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복지대학원 원우회장. 제5대 양평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현 양평군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양평군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현 양평군의회 무소속의원으로 재직중인 김덕수입니다. 2, 경영일선에서 사업가로 발판을 굳혔는데 불구하고 양평군의회 2선의원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취지에 대한 설명 소개를 한다면? 2001년도에 고향에 와서 본 양평의 모습은 변화의 모습은커녕 암울했습니다. 각종규제로 지역개발을 못하고 재정자립도가 경기도 최하위로 군민들은 허리끈을 졸라매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민이 먹고사는 문제해결의 근본을 찾기 보다는 임시방편의 선심성 행정의 눈가림이 양평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누군가는 입바른 쓴 소리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의원이 목표는 아니었지만 시작은 될 수 있을 꺼라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 것이 군 의원 도전이었습니다. 3, 양평군의회 유일한 2선의원으로써 양평군정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군민들의 불만은 그 도를 넘고 있습니다. 군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투명하게 공개하고 먼저 알려서 군민을 위한 정책이 되도록 해야 하며 군민의 의견을 추상같이 받들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의입니다. 아직도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평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개혁을 하지 못하면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원이든 군수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자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놓치면 군민들로부터 개혁을 당하는 일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4, 지난 3월 세종로 중앙청사 앞에는 삭발을 하고 “위법행정이 세금 낭비를 부추키고 있다”며 진눈개비를 맞으며 1인 시위를 펼쳤는데 간단한 설명을 해 달라? 양평군 위법행정의 잘못됨을 여러차레 경고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힘의 논리에 밀려 결국 1인 시위를 하게 되었고 양평의 혈세낭비 사업에 대해 중앙일보 5월 6,7,9일자에서 양평의 위법행정과 세금낭비 사업에 대하여 감사원도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질 타 했으나 전혀 시정되지 않아 이러한 무소불위의 지방권력에 제동을 걸고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지금 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군민들의 불만은 그 도를 넘고 있습니다. 군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투명하게 공개하고 먼저 알려서 군민을 위한 정책이 되도록 해야 하며 군민의 의견을 추상같이 받들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의입니다. 아직도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평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개혁을 하지 못하면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원이든 군수든 국회의원이든 공직자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놓치면 군민들로부터 개혁을 당하는 일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5,김덕수의원이 행전안전부와 청와대 1인 삭발 단식 시위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우리 군과 같이 재정이 열악한 지방단체 일수록 군민의 피와 땀으로 모아진 혈세를 단돈 1원이라도 법과 원칙에 따라 효율적이고 계획적으로 사용해야합니다. 경기도 31개 시 군중 양평군은 12개 읍면에 인조, 천연잔디구장 등 수십개의 종목별 체육시설이 가장 잘 조성 되어 있습니다. 양평군이 종합운동장을 추진하면서 의회가 예산을 승인해줘도 군민여론조사를 통해 군민이 50%이상 지지할 때 추진하고 50%가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던 의회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일방적이고 의도적이고 공무원이 작성한 행정전횡적인 유도설문내용으로 여론조사를 했고 여론조사 결과로 사업추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전에 부지매입을 먼저 해 어처구니없는 행정으로 군민을 우롱했습니다. 종합운동장을 추진하면서 공유재산관리계획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행안부와 법제처의 공식답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종합운동장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업이라면 왜 법과 원칙대로 진행하지 않습니까? 왜 군민 앞에 떳떳하고 올바른 여론조사를 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어기며 의회를 무시하고 강행하며 수백억을 빚까지 내가며 강행하는지 백운테마파크 사업은 군민과 의회의 끊임없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도로도 확보 안 된 채 100억여 원을 집행했고 테마파크에 테마도 없이 예산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오빈역사에 123억 7000만원을 빗으로 건설하고도 모자라 운영적자를 양평군이 부담하는 굴욕적 불평등 계약에 의해 매년 수억원씩 운영적자를 부담해야하며 최장 30년까지 지불하는 철도공사와의 계약으로 혈세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데 지방행정을 감시하라는 준엄한 명령과 함께 군민이 직접 달아준 군의회 의원의 배지 앞에서 잘못된 행정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지방행정개혁을 요구하면서 삭발과 단식을 하며 정부청사 청와대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한 것이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해도 가슴속 열정만큼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삭발과 단식을 통해 국민의 바램을 관계 실무자에게 전달했고 지방자치제도의 문제점의 개선을 위한 제도개혁을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그 이후 맹형규 장관은 지자체 투융자심사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예산낭비성 사업은 착수하지 못하도록 할 것, 단체장에 대한 횡령, 뇌물, 에 따른 보궐선거비용 본인 책임 등 단체장에 대한 권한 감시권 확대 방침발표를 한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감사를 드리며 철저한 제도적 보완을 통한 강력하고도 시급히 시행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말씀해 주신다면? 진정으로 양평군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중첩 규제인 수도권정비계획법, 환경정책기본법, 한강수계상수원 수질개선법, 수도법, 군사시설보호법등에 의해 4년제 종합대학 설립이 안 되고 제조업 공장이 제한을 받아 고용창출이 안 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양평에 집을 지으려면 전 가족이 6개월 거주를 해야 하며 97년도 이후 분할된 토지에 대하여는 1인이 1번 밖에 건축행위를 할 수 없어 양평에는 거주이전에 자유가 박탈되어 인구유입이 안되고 내 재산권마저 유린당해 개발행위를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저는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하수종말처리장을 국비로 지원 받아 건립되었지만 2010.9.30에 하수도정비기본계획 승인이 총사업비 900여억원 중 700여억원을 원인자 부담으로 승인 받아 양평군 재정으로 700여억을 부담해야 하는 막대한 재정난 때문에 착공조차 못하고 있어 향후 도시개발계획에 차질이 있어 이대로는 양평시가 될 수 없어 원인자 부담은 국비 지원으로 시급히 개선 시켜야 합니다. 더불어 없던 오빈역도 100% 군비로 설치한 양평군이 수십년 동안 운영해 왔던 석불역, 매곡역 운영을 안 하겠다는 중앙정부의 정책과 횡포에 놀아나는 현실은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고 소외된 주민들의 삶의 기본권을 위해 반드시 두 역 운영은 기존대로 운영되어야만 합니다. 7, 김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느낀 군정의 지표와 해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양평군의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것을 감안하지 않는 방만한 혈세사업의 개선을 촉구 하면서 군민들의 참여와 뜻을 받들어 발전적인 사업을 이끌어 양평군을 대한민국의 최고의 도시로 발돋움시켜 가야 하는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둘째 군민들은 군정의 개혁과 혁신적 변화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바 군정이 더 이상 혁신을 미룬다는 것은 양평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언제까지 규제만 운운하며 스스로의 개혁은 중앙정부 탓만 하며 뒷전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이란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내어 새살이 돋아나오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양평군의 새 희망이 보이고 100년 양평의 새로운 전통을 이어 갈 더 큰 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문화, 공연, 예술, 친환경농업 등 다양하고 공격적인 공공사업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양평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평군정은 미래를 내다보는 아래로부터의 행정개혁을 해야 합니다. 넷째 밀실행정을 청산하고 공개행정, 투명행정을 펼쳐 민의를 받들라고 만든 것이 풀뿌리 지방자치인 만큼 행정과 정책의 투명한 공개만이 양평군정이 한발 더 앞서나가는 지름길입니다. 8, 끝으로 양평군민과 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10만여 양평군민의 양평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사명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하며 바른 의정을 하겠다는 것을 군민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양평의 미래를 더욱 희망차게 지키기 위해 저 김덕수는 한 알의 씨앗을 심겠습니다. ‘군정은 군민의 것이며 행정은 오직 군민을 향해야 한다’ 는 것이 저 김덕수의 신념이기에 양평군의 미래를 위해 불법적인 행태를 뿌리 뽑고 중앙정부의 규제에 맞서 양평군민 모두 하나가 되어 승리하고 쟁취해야 할 것입니다.
    • 초대석
    2011-11-20
  • 장학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관장
    금주의초대석-월전 장우성114점의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한-중 교류전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 개최장우성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 관장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병환이 악화 되면서 3남인 본인에게 월전미술문화 재단을 맡아 운영하기를 바라시는 부친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2000년 경희대 미술관 박물관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후 월전 미술관을 이천시립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를 남기시고 2005년 부친이 서거 하였고 그 뜻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 2007년 8월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으로 개관 하여 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989년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대표적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재단에 기증 이를 토대로 1991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시립월전 미술관을 개관 건립하였고 부친은 그 규모와 역량을 확충하고 공익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월전미술관을 이천시립 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에 의해 114점의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하게 된 것이다. 주요작품으로는 충무공이순신영정(현충사소장) 백두산천지도(국회의사당소장) 한국의성모와 순교복자 성화3부작 바티칸(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화실(삼성미술관 리움) 새안(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문화성) 회고(독일 쾰론 시립박물관) 노묘(이천시립월전박물관)등 국내외 주요기관에 다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2008년 중국 심천이 배출한 영남화파의 거장 관산월 선생의 작품을 들여와 한-중 교류전을 개최 하였고 월전 선생 작품이 중국 심천 관산월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하였고 한국과 몽골과의 미술교류협약을 계기로 친근한 벗인 현 몽골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 관계로 인하여 그 친분을 살려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을 개최 하였고 한국과 몽골의 미술교류전도 꾸준히 추진되고 있으며 그 외 서양 선진 미술계와 미술 교류전을 계획하고 있다.이천시립월전박물관 소장품으로는 114점의 유작과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추사김정희 작품과 국내외 고미술품 1,532점의 작품들이 기증 보관되어 전시 되고 있다. “반성은 하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란 인생의 좌우명아래 사리사욕 없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창조하면서 주워진 여건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삶의 가치와 생활의 지혜를 간직하며 묵묵히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실천하면서 남은여생 남을 위해 헌신 봉사 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란 생활신조 아래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장학구 시립 월전미술관 관장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장학구 시립 월전미술관 관장의 대담을 통해 장학구 관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경영능력평가와 검증 시립월전미술관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 맑고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장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에서 1941년 출생하여 54년 백사초등학교 이천중학교 서울중동고등학교를 거쳐 튼튼한 기업을 일궈 많은 이들에게 생활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하고 국가 원동력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중앙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65년에 졸업을 하였다. 1967년 (주)태성물산 전무이사 코스모스물산 업무부장 광진무역 전무이사직을 끝으로 직장 생활을 마무리 하였고 직장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세라믹 제조와 공업용으로 쓰이는 불연재 보드 전문 제조업체인 (주)이풍세라믹을 1992년에 설립 사업가로서 자리를 굳히며 승승장구 하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병환이 악화 되면서 3남인 본인에게 월전미술문화 재단을 맡아 운영하기를 바라시는 부친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2000년 경희대 미술관 박물관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후 월전 미술관을 이천시립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를 남기시고 2005년 부친이 서거 하였고 그 뜻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 2007년 8월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으로 개관 하여 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2, 현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이 오늘이 있기까지에 취지에 대한 설명 소개를 한다면? 월전 장우성 선생이 생전 한국화단을 위해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는 뜻을 세우고 1989년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대표적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재단에 기증 이를 토대로 1991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시립월전 미술관을 개관 건립하였고 부친은 그 규모와 역량을 확충하고 공익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월전미술관을 이천시립 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에 의해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하게 된 것이다. 3, 한국 미술계의 거장 월전 장우성 화백의 3남으로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2000억원대의 유물을 기증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 관장직에 재임 하고 있는데 주목적이 무엇인가?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은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창립멤버로서 교단에 서기 시작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한국예술 발전을 위해 월전 문화재단을 설립 하고 진정한 한국 미술의 창조와 가치에 대해 평생 고뇌하였기 때문에 그 고뇌의 산물로 대표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전부 재단에 기증하였고 그 규모와 역량 확충에 따른 공익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지와 뜻을 받들어 이천시에 기증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을 통해 한국미술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였다. 4, 부친 월전 장우성 화백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해 달라? 월전 장우성 화백은 1912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여 김은호에게 사사하여 인물화를 주로 그린 공필진채 초기에 주력하였고 해방후 공필진채를 탈피한 수묵화 전통문인화에 서양화의 기법을 접목시킨 신문화인 였다.1960년대 미국에 3년간 체류하면서 한국화를 널리 알렸고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미술교육에 힘썼으며 귀국후 동양화 세계화에 몰두 하였고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사군자 서예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통해 문인화적 격조의 한국화를 그렸다. 만년에 월전미술재단을 설립 하여 평생의 업적을 공익화 하였으며 월전미술관 “한벽루”을 설립하여 월전미술상을 제정하였으며 동방예술연구회를 두어 원로석학들로 하여금 다양한 예술 분야의 이론 강좌를 강의 하도록 하여 이 강좌 성과를 선생은 매년 문집 한벽문총으로 발간 하였다. 5,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의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대표적 유작과 소장품을 소개를 한다면? 주요작품으로는 충무공이순신영정(현충사소장) 백두산천지도(국회의사당소장) 한국의성모와 순교복자 성화3부작 바티칸(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화실(삼성미술관 리움) 새안(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문화성) 회고(독일 쾰론 시립박물관) 노묘(이천시립월전박물관)등 국내외 주요기관에 다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천시립월전박물관 소장품으로는 114점의 유작과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추사김정희 작품과 국내외 고미술품 1,532점의 작품들이 기증 보관되어 전시 되고 있다. 6,최근 서울 삼청동 소재한 전시관 부지 500평 시가 600억 원대를 이천시에 기증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 부친의 뜻을 받들어 후학양성과 한국예술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원했고 이천을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으려 했던 부친의 뜻과 유지를 받들고 이천시의 재정 부담을 덜어 주워 이천시립월전 미술관을 통해 한국미술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부친의 뜻을 모두 실천하기 위해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7, 한국의 미술계 거장인 원전 장우성선생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부친의 수제자로서 후광을 업고 미술계에 투신 성공을 할 기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는? 부친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부친의 충고로 인해 마음속으로만 미술에 대한 사랑을 심기로 했다. 특히 손끝의 재주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늘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미술이론에 힘쓰라 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기며 화가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그 철학안에는 역사의식과 끝없는 고뇌와 더불어 학문적인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의 길은 가지 않았지만 문화 예술의 보존과 미술에 대한 사랑은 늘 품고 있다. 8,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개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이래 대표적인 행사와 전시회를 비롯 대형 교류전이 있다면 밝혀 달라? 2008년 중국 심천이 배출한 영남화파의 거장 관산월 선생의 작품을 들여와 한-중 교류전을 개최 하였고 월전 선생 작품이 중국 심천 관산월 미술관에서 전시되기ㅐ도 하였고 한국과 몽골과의 미술교류협약을 계기로 친근한 벗인 현 몽골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 관계로 인하여 그 친분을 살려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을 개최 하였고 한국과 몽골의 미술교류전도 꾸준히 추진되고 있으며 그 외 서양 선진 미술계와 미술 교류전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2012년도는 부친 월전 선생의 탄생100주기를 맞는 해로서 평생 한국화가 나아갈길을 모색한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는 근현대 한국화에 대한 탐구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자 오는 11월20일까지 20세기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적인 수묵화가 스물한분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 현대 수묵산수화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20세기 수묵산수화전”허백련 육곡산수병풍 노수현 산수도 박승무 도원춘심 김은호 금강여우 이상범 효천보희 변관식 천태폭포 이응노 외금강 이열모 주왕산계곡 배 렴 상월 박노수 월하고사도 이인실 여정 조평휘 계룡산 장우성 백두산천지도 임송희 우후정산 이종상 무묵 이영찬 추폭 김동수 남설악 송영방 우후금강 정탁영 하 을 전시 하고 있다. 9,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의 운영상 애로사항과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면 밝혀 달라? 무엇 보다 현재 미술관의 규모에서는 소장품에 비해서 면적이 현저히 모자라고 또한 시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작품 하나하나에서 부터 모든 개별 조명 시설과 보관 상태가 제대로 이뤄 지지 않아 소장된 작품들의 가치와 예술성의 혼을 느끼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소장품가치가 저하되고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 또한 설봉공원 축제로 인하여 축제시 차량 안내와 축제장 안내를 경호 용역에서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진입시비와 함께 무조건 통제로 인해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찾아 왔다가 되돌아가는 고객들로부터 항의와 문제점개선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하루 빨리 개선 할 문제인 것이다. 10,본인의 좌우명 간단한 생활신조을 소개 한다면? “반성은 하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란 인생의 좌우명아래 사리사욕 없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창조하면서 주워진 여건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삶의 가치와 생활의 지혜를 간직하며 묵묵히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실천하면서 남은여생 남을 위해 헌신 봉사 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란 생활신조 아래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11, 하나로신문 독자와 시민들에게 당부 및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제 이천 시립월전 미술관은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이천시민 전체의 재산이며 주인으로서 국/공립미술관으로는 도내에서 유일한 자산입니다. 앞으로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 성원이 이어져 국내 최고의 미술관으로 발전시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많은 성원과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 초대석
    2011-11-18
  • 장학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관장
    금주의초대석-월전 장우성114점의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한-중 교류전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 개최장우성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 관장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병환이 악화 되면서 3남인 본인에게 월전미술문화 재단을 맡아 운영하기를 바라시는 부친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2000년 경희대 미술관 박물관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후 월전 미술관을 이천시립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를 남기시고 2005년 부친이 서거 하였고 그 뜻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 2007년 8월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으로 개관 하여 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989년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대표적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재단에 기증 이를 토대로 1991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시립월전 미술관을 개관 건립하였고 부친은 그 규모와 역량을 확충하고 공익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월전미술관을 이천시립 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에 의해 114점의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하게 된 것이다. 주요작품으로는 충무공이순신영정(현충사소장) 백두산천지도(국회의사당소장) 한국의성모와 순교복자 성화3부작 바티칸(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화실(삼성미술관 리움) 새안(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문화성) 회고(독일 쾰론 시립박물관) 노묘(이천시립월전박물관)등 국내외 주요기관에 다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2008년 중국 심천이 배출한 영남화파의 거장 관산월 선생의 작품을 들여와 한-중 교류전을 개최 하였고 월전 선생 작품이 중국 심천 관산월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하였고 한국과 몽골과의 미술교류협약을 계기로 친근한 벗인 현 몽골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 관계로 인하여 그 친분을 살려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을 개최 하였고 한국과 몽골의 미술교류전도 꾸준히 추진되고 있으며 그 외 서양 선진 미술계와 미술 교류전을 계획하고 있다.이천시립월전박물관 소장품으로는 114점의 유작과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추사김정희 작품과 국내외 고미술품 1,532점의 작품들이 기증 보관되어 전시 되고 있다. “반성은 하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란 인생의 좌우명아래 사리사욕 없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창조하면서 주워진 여건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삶의 가치와 생활의 지혜를 간직하며 묵묵히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실천하면서 남은여생 남을 위해 헌신 봉사 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란 생활신조 아래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장학구 시립 월전미술관 관장 대담:정봉영 발행인 본지에서는 금주의 초대석을 기획시리즈 본지 하나로신문 발행인 정봉영과 장학구 시립 월전미술관 관장의 대담을 통해 장학구 관장에 대한 지도자 역량과 자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올바른 경영능력평가와 검증 시립월전미술관에 대한 견해와 활동상과 식견 미래와 발전 방향 문제점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듣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주민들과 하나로신문 독자분들을 위해서 간단한 개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물 맑고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장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에서 1941년 출생하여 54년 백사초등학교 이천중학교 서울중동고등학교를 거쳐 튼튼한 기업을 일궈 많은 이들에게 생활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하고 국가 원동력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중앙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65년에 졸업을 하였다. 1967년 (주)태성물산 전무이사 코스모스물산 업무부장 광진무역 전무이사직을 끝으로 직장 생활을 마무리 하였고 직장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세라믹 제조와 공업용으로 쓰이는 불연재 보드 전문 제조업체인 (주)이풍세라믹을 1992년에 설립 사업가로서 자리를 굳히며 승승장구 하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병환이 악화 되면서 3남인 본인에게 월전미술문화 재단을 맡아 운영하기를 바라시는 부친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2000년 경희대 미술관 박물관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후 월전 미술관을 이천시립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를 남기시고 2005년 부친이 서거 하였고 그 뜻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 2007년 8월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으로 개관 하여 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2, 현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이 오늘이 있기까지에 취지에 대한 설명 소개를 한다면? 월전 장우성 선생이 생전 한국화단을 위해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는 뜻을 세우고 1989년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대표적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재단에 기증 이를 토대로 1991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시립월전 미술관을 개관 건립하였고 부친은 그 규모와 역량을 확충하고 공익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월전미술관을 이천시립 미술관으로 전환한다는 유지에 의해 유작과 소장품1,532점을 기증 개관하게 된 것이다. 3, 한국 미술계의 거장 월전 장우성 화백의 3남으로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2000억원대의 유물을 기증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 관장직에 재임 하고 있는데 주목적이 무엇인가?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은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창립멤버로서 교단에 서기 시작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한국예술 발전을 위해 월전 문화재단을 설립 하고 진정한 한국 미술의 창조와 가치에 대해 평생 고뇌하였기 때문에 그 고뇌의 산물로 대표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고미술품을 전부 재단에 기증하였고 그 규모와 역량 확충에 따른 공익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지와 뜻을 받들어 이천시에 기증 이천시립 월전 미술관을 통해 한국미술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였다. 4, 부친 월전 장우성 화백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해 달라? 월전 장우성 화백은 1912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여 김은호에게 사사하여 인물화를 주로 그린 공필진채 초기에 주력하였고 해방후 공필진채를 탈피한 수묵화 전통문인화에 서양화의 기법을 접목시킨 신문화인 였다.1960년대 미국에 3년간 체류하면서 한국화를 널리 알렸고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미술교육에 힘썼으며 귀국후 동양화 세계화에 몰두 하였고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사군자 서예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통해 문인화적 격조의 한국화를 그렸다. 만년에 월전미술재단을 설립 하여 평생의 업적을 공익화 하였으며 월전미술관 “한벽루”을 설립하여 월전미술상을 제정하였으며 동방예술연구회를 두어 원로석학들로 하여금 다양한 예술 분야의 이론 강좌를 강의 하도록 하여 이 강좌 성과를 선생은 매년 문집 한벽문총으로 발간 하였다. 5,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의 부친 월전 장우성 선생의 대표적 유작과 소장품을 소개를 한다면? 주요작품으로는 충무공이순신영정(현충사소장) 백두산천지도(국회의사당소장) 한국의성모와 순교복자 성화3부작 바티칸(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화실(삼성미술관 리움) 새안(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문화성) 회고(독일 쾰론 시립박물관) 노묘(이천시립월전박물관)등 국내외 주요기관에 다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천시립월전박물관 소장품으로는 114점의 유작과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추사김정희 작품과 국내외 고미술품 1,532점의 작품들이 기증 보관되어 전시 되고 있다. 6,최근 서울 삼청동 소재한 전시관 부지 500평 시가 600억 원대를 이천시에 기증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 부친의 뜻을 받들어 후학양성과 한국예술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원했고 이천을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으려 했던 부친의 뜻과 유지를 받들고 이천시의 재정 부담을 덜어 주워 이천시립월전 미술관을 통해 한국미술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부친의 뜻을 모두 실천하기 위해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7, 한국의 미술계 거장인 원전 장우성선생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부친의 수제자로서 후광을 업고 미술계에 투신 성공을 할 기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는? 부친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부친의 충고로 인해 마음속으로만 미술에 대한 사랑을 심기로 했다. 특히 손끝의 재주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늘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미술이론에 힘쓰라 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기며 화가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그 철학안에는 역사의식과 끝없는 고뇌와 더불어 학문적인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의 길은 가지 않았지만 문화 예술의 보존과 미술에 대한 사랑은 늘 품고 있다. 8,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개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이래 대표적인 행사와 전시회를 비롯 대형 교류전이 있다면 밝혀 달라? 2008년 중국 심천이 배출한 영남화파의 거장 관산월 선생의 작품을 들여와 한-중 교류전을 개최 하였고 월전 선생 작품이 중국 심천 관산월 미술관에서 전시되기ㅐ도 하였고 한국과 몽골과의 미술교류협약을 계기로 친근한 벗인 현 몽골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 관계로 인하여 그 친분을 살려 “몽골 자연을 안고 대륙을 누비다”전을 개최 하였고 한국과 몽골의 미술교류전도 꾸준히 추진되고 있으며 그 외 서양 선진 미술계와 미술 교류전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2012년도는 부친 월전 선생의 탄생100주기를 맞는 해로서 평생 한국화가 나아갈길을 모색한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는 근현대 한국화에 대한 탐구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자 오는 11월20일까지 20세기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적인 수묵화가 스물한분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 현대 수묵산수화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20세기 수묵산수화전”허백련 육곡산수병풍 노수현 산수도 박승무 도원춘심 김은호 금강여우 이상범 효천보희 변관식 천태폭포 이응노 외금강 이열모 주왕산계곡 배 렴 상월 박노수 월하고사도 이인실 여정 조평휘 계룡산 장우성 백두산천지도 임송희 우후정산 이종상 무묵 이영찬 추폭 김동수 남설악 송영방 우후금강 정탁영 하 을 전시 하고 있다. 9,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의 운영상 애로사항과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면 밝혀 달라? 무엇 보다 현재 미술관의 규모에서는 소장품에 비해서 면적이 현저히 모자라고 또한 시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작품 하나하나에서 부터 모든 개별 조명 시설과 보관 상태가 제대로 이뤄 지지 않아 소장된 작품들의 가치와 예술성의 혼을 느끼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소장품가치가 저하되고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 또한 설봉공원 축제로 인하여 축제시 차량 안내와 축제장 안내를 경호 용역에서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진입시비와 함께 무조건 통제로 인해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찾아 왔다가 되돌아가는 고객들로부터 항의와 문제점개선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하루 빨리 개선 할 문제인 것이다. 10,본인의 좌우명 간단한 생활신조을 소개 한다면? “반성은 하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란 인생의 좌우명아래 사리사욕 없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창조하면서 주워진 여건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삶의 가치와 생활의 지혜를 간직하며 묵묵히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실천하면서 남은여생 남을 위해 헌신 봉사 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자란 생활신조 아래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11, 하나로신문 독자와 시민들에게 당부 및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제 이천 시립월전 미술관은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이천시민 전체의 재산이며 주인으로서 국/공립미술관으로는 도내에서 유일한 자산입니다. 앞으로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 성원이 이어져 국내 최고의 미술관으로 발전시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많은 성원과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 초대석
    2011-11-18
  • 향기36. 흙과 불을 쫓아온 50년, 마지막 옛 ‘도공(陶工)’ 한도 서광수
    대한민국 도예명장14호,지문없는 “무형문화재41호, 사기장(沙器匠)” “선조 도공들의 삶과 그들이 남겨준 도편(陶片)이 나의 스승” “비취색(翡翠色)을 자아내는 청자의 빛과 어머님의 손때 묻은 유백색(乳白色) 백자의 빛깔은 우리만의 정과 사랑이 녹아있는 감성의 색” “달항아리로 무형문화재 사기장(41호)에 선정된 국내 최고의 도예인”2005년 1월23일 이천 신둔 한도요에는 큰 축제가 벌어졌다. “대한민국 명장,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도 서광수”란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 제막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승우 시장, ‘이천 문화사랑 모임 왕호상 회장, 이상구 문화원장, 윤창호 도자기 조합 이사장 등 각계의 인사들150여명이 함께모여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천 도자기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경사의 날이었다. 88년 한국 도자기의 전설 해강 유근형,지순택옹이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래 이천에서 세번째로 서광수씨가 경기도 무형문화재(사기장;조선시대 사옹원에서 사기그릇을 제작하던 장인을 일컷는 말)로 지정된 것이었다,지난해 말 12월16일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가 열려 총 심의대상 16건 중 4건을 확정하였으며, 서광수씨는 성형능력, 굽깍는 솜씨, 경력 등을 인정받아 순백자 부문 보유기능자로 지정 되었다.서명장은 발 물레의 달인으로 심의 당시 그의 뛰어난 솜씨를 심사할 심사위원이 없어 실사를 생략하고 심사를 서류전형으로 대체한 일화는 그의 도예기능이 대한민국 정상의 위치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이천에는 항산 임항택씨, 해강 유광렬씨와 한도 서광수씨 3인이 전통공예부문 대한민국 명장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스카웃해 도평요 설립” 박정히 대통령시절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였으며 도자기에 깊은 조예와 관심을 갖고 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지순택요에서 성형실장, 소성실장으로 일하던 27세의 젊은 그가, 지순택요에서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인재임에 주목한다. 얼마 후 점찍어 놨던 그를 스카웃하여 도평요를 창설하고 가마장(공장장)으로 10여년이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도자기작업의 사령탑을 맡긴 일화는 서명장의 도예기능이 국내 최정상에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일화이다. 이후락씨의 가마장을 거쳐 그는 86년 삼보요가 있었던 사음리 현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농가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61년도 초등학교를 졸업 후 진사도자기의 대가로 알려진 홍재표씨가 운영하던 칠기 그릇공장에 들어가 3년간 일을 배운다.63년부터 해강 유근형씨와 더불어 당시 한국 도자 역사의 양대 축 중 한분으로 한국도자기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도암 지순택(고려요)님의 문하로 들어가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인정받아 71년, 고려요에서 성형실장 74년 불을 주관하는 소성(燒成,장장불지피는일)담당으로,76년에는 이후락씨의 도평요 가마장으로 10년을 근무하며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86년에 신둔 남정리에 한도요를 설립한다. 2001년에는 도자기 분야 경기 으뜸이, 2003년에는 대한민국 명장에 이어 2005년도에 무형문화재 ‘사기장’에 지정되는 경사를 맞이한 것이었다. “한국 도자기의 아버지인 ‘지순택 선생의 고려요 성형실장 출신”그를 이해 하려면 한국의 근대 도자역사를 이해해야한다.조선조말 광주군 분원에 있던 관요가 문을 닫는다. 그 후 일류도공들은 민요(民窯)로 옮겨가며 막사발과 왜색 생활자기들의 생산에 전념하며 우리고유의 도자기의 맥이 끊기게 된다.그 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1956년 가을 조각가 윤호중에 의해 한국 미술품 연구소(속칭 대방동 가마)가 설립되었으며 당시 일류 도공들이 그곳으로 몰렸다.윤호중씨가 대표였고 지순택씨가 공장장 이었다. 지순택 밑으로 성형부에 고명순...,조각부에 김완배(현 송월요 김종호 부친), 유근형(현 해강도자기연구소 유광열 부친)등이 포진하였다.얼마 후 한국 미술품 연구소가 문을 닫고 지순택 공장장은 신둔에 고려도요, 방철주는 동국도요, 조소수는 광주요, 유근형, 유광렬부자는 해강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한다.이렇게 되어 도암 지순택(고려도요), 해강 유근형(해강고려청자연구소), 2인(한국 근대 도예인 최고의 2인방, 혹은 이들 2인을 이천 도예 1세대로 부른다.)이 이천 도예촌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서 명장은 해방 후 우리나라 도예의 본산인 대방동가마의 공장장 출신인 지순택의 맥을 잇는 고려도요의 성형실장, 소성담당으로 현재 생존한 도예인중 유일한 도예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그를 늘 지근(至近)에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의 외모에서 느껴지듯 우직하게 선조 도공( 陶工)의 족적(足跡)을 쫓는다. 소박하고 고결한 격조가 느껴진다. 조선백자의 미(美)를 쫓는 그는 조선선비의 고결한 자존심(自尊心)과 자긍심(自矜心)과 많이도 닮아있다. 그의 도예방법은 늘 옛 방식을 추구한다. 발 물레를 고집하고 달 항아리는 상하부를 이어 붙여 조상들 고유의 제작방법을 고수한다. 서산백토와 하동백토를 사용하며 도석, 대리석, 석회석 등을 혼합하여 유약을 만든다. 그의 도자기들은 고풍스러워 우리의 옛 작품들과 많이도 닮아 있다. 서민적이고 낭만적이며, 그의 당당한 풍채만큼이나 남성적이기도 하다. 고상하고 우아하다. 화려한 듯 절제된 작품의 선과 어머니 젖가슴에서 갖짜낸 유백색(乳白色)을 띈 도자기는, 마치 500년 된 조선 소나무를 앞에 놓은양, 깊은 권위가 느껴진다. 그의 백자 달 항아리와 마주하면 국립 민속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의 국보 달 항아리와 혼돈을 일으킨다. 진사를 사용한 백자동자 주전자병은 그 선과 유약의 색상이 고풍스럽고 단아하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에 넊을 잃는다. 신비한 깊이를 자랑하는 청자대나무 매병을 보노라면 서명장의 작품이 결코 고려시대 도공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고려청자를 뛰어 넘는다라는 확신이 밀려온다. 분청고형 항아리 앞에서면 누런 호박색 분위기를 풍기는 색상의 유약을 보노라면 한 덩어리의 황금덩어리가 내 앞에 있는 양 가슴이 떨려온다. 그는 도예고를 나와 군산대 도예과 2학년인 조카 (서강역) 자랑을 할때 면 눈에 생기가 돈다. 얼마 전 KBS아침마당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전국의 도예가들이 겨루는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예,성형분야‘에서 학생신분임에도 3위에 입상하였다‘고 자랑을 한다. 조카는 현재 서명장의 기능 이수자 3명중 하나이다.(5년의 수련과정을 거쳐 1명이 전수자로 지정된다.)“내 작품은 불의 혼과 나의 혼의 합작품”-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인격체인 나와 인격체를 가진 불의 합작품이다. 나는 물레와 성형을 하고 그림을 그려 넣어 가마에 넣으면 그때부터는 불이 자신만의 솜씨로 작품을 빚는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할 뿐이다. 불이 허락하는 작품은 10-20%이내이다. 사람들은 나의 혼과 불의 혼의 합작품을 좋아 하는 것 같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도자기를 좋아한다. 일본, 중국의 도자기와 우리 도자기의 차이점은?-“6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자연미를 지닌 우리작품들에 눈이 떴었다. 그때 지순택 선생 가마로 막사발, 청자, 백자 등이 매달 수 천 개씩 일본으로 수출됐다. 성형실장으로 일하면서 매일 밤샘작업을 했다. 중국의 화려함이나 일본의 깔끔, 정교함 보다 우리 고유의 우직함, 거친 맛, 중후한 자연미에 매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들도 우리 전통도자기들을 흉내 냈지만 우리처럼 불의 혼으로 모양과 색깔이 나오는 도예기법은 흉내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도예인으로 존경받는다.2007년 9월에는 일본NHK방송국 특집으로 ‘한국 도자기의 명장’ 촬영을 재일동포 탤런트 유민씨가 한도요로 날아와 도자기제작 전 과정을 촬영해 일본전역으로 방영하기도 하였다.후쿠오카 미술관, 다이마루 백화점, 교또 킨텐츠 백화점 초대전등 수많은 일본 초대전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팬들이 형성되어있다. 심지어 일본 아사이 제과(주) 대표를 축으로‘한도 서광수를 사랑하는 일본 모임’도 있다.
    • 초대석
    2011-11-01
  • 향기36. 흙과 불을 쫓아온 50년, 마지막 옛 ‘도공(陶工)’ 한도 서광수
    대한민국 도예명장14호,지문없는 “무형문화재41호, 사기장(沙器匠)” “선조 도공들의 삶과 그들이 남겨준 도편(陶片)이 나의 스승” “비취색(翡翠色)을 자아내는 청자의 빛과 어머님의 손때 묻은 유백색(乳白色) 백자의 빛깔은 우리만의 정과 사랑이 녹아있는 감성의 색” “달항아리로 무형문화재 사기장(41호)에 선정된 국내 최고의 도예인”2005년 1월23일 이천 신둔 한도요에는 큰 축제가 벌어졌다. “대한민국 명장,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도 서광수”란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 제막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승우 시장, ‘이천 문화사랑 모임 왕호상 회장, 이상구 문화원장, 윤창호 도자기 조합 이사장 등 각계의 인사들150여명이 함께모여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천 도자기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경사의 날이었다. 88년 한국 도자기의 전설 해강 유근형,지순택옹이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래 이천에서 세번째로 서광수씨가 경기도 무형문화재(사기장;조선시대 사옹원에서 사기그릇을 제작하던 장인을 일컷는 말)로 지정된 것이었다,지난해 말 12월16일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가 열려 총 심의대상 16건 중 4건을 확정하였으며, 서광수씨는 성형능력, 굽깍는 솜씨, 경력 등을 인정받아 순백자 부문 보유기능자로 지정 되었다.서명장은 발 물레의 달인으로 심의 당시 그의 뛰어난 솜씨를 심사할 심사위원이 없어 실사를 생략하고 심사를 서류전형으로 대체한 일화는 그의 도예기능이 대한민국 정상의 위치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이천에는 항산 임항택씨, 해강 유광렬씨와 한도 서광수씨 3인이 전통공예부문 대한민국 명장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스카웃해 도평요 설립” 박정히 대통령시절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였으며 도자기에 깊은 조예와 관심을 갖고 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지순택요에서 성형실장, 소성실장으로 일하던 27세의 젊은 그가, 지순택요에서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인재임에 주목한다. 얼마 후 점찍어 놨던 그를 스카웃하여 도평요를 창설하고 가마장(공장장)으로 10여년이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도자기작업의 사령탑을 맡긴 일화는 서명장의 도예기능이 국내 최정상에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일화이다. 이후락씨의 가마장을 거쳐 그는 86년 삼보요가 있었던 사음리 현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농가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61년도 초등학교를 졸업 후 진사도자기의 대가로 알려진 홍재표씨가 운영하던 칠기 그릇공장에 들어가 3년간 일을 배운다.63년부터 해강 유근형씨와 더불어 당시 한국 도자 역사의 양대 축 중 한분으로 한국도자기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도암 지순택(고려요)님의 문하로 들어가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인정받아 71년, 고려요에서 성형실장 74년 불을 주관하는 소성(燒成,장장불지피는일)담당으로,76년에는 이후락씨의 도평요 가마장으로 10년을 근무하며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86년에 신둔 남정리에 한도요를 설립한다. 2001년에는 도자기 분야 경기 으뜸이, 2003년에는 대한민국 명장에 이어 2005년도에 무형문화재 ‘사기장’에 지정되는 경사를 맞이한 것이었다. “한국 도자기의 아버지인 ‘지순택 선생의 고려요 성형실장 출신”그를 이해 하려면 한국의 근대 도자역사를 이해해야한다.조선조말 광주군 분원에 있던 관요가 문을 닫는다. 그 후 일류도공들은 민요(民窯)로 옮겨가며 막사발과 왜색 생활자기들의 생산에 전념하며 우리고유의 도자기의 맥이 끊기게 된다.그 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1956년 가을 조각가 윤호중에 의해 한국 미술품 연구소(속칭 대방동 가마)가 설립되었으며 당시 일류 도공들이 그곳으로 몰렸다.윤호중씨가 대표였고 지순택씨가 공장장 이었다. 지순택 밑으로 성형부에 고명순...,조각부에 김완배(현 송월요 김종호 부친), 유근형(현 해강도자기연구소 유광열 부친)등이 포진하였다.얼마 후 한국 미술품 연구소가 문을 닫고 지순택 공장장은 신둔에 고려도요, 방철주는 동국도요, 조소수는 광주요, 유근형, 유광렬부자는 해강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한다.이렇게 되어 도암 지순택(고려도요), 해강 유근형(해강고려청자연구소), 2인(한국 근대 도예인 최고의 2인방, 혹은 이들 2인을 이천 도예 1세대로 부른다.)이 이천 도예촌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서 명장은 해방 후 우리나라 도예의 본산인 대방동가마의 공장장 출신인 지순택의 맥을 잇는 고려도요의 성형실장, 소성담당으로 현재 생존한 도예인중 유일한 도예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그를 늘 지근(至近)에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의 외모에서 느껴지듯 우직하게 선조 도공( 陶工)의 족적(足跡)을 쫓는다. 소박하고 고결한 격조가 느껴진다. 조선백자의 미(美)를 쫓는 그는 조선선비의 고결한 자존심(自尊心)과 자긍심(自矜心)과 많이도 닮아있다. 그의 도예방법은 늘 옛 방식을 추구한다. 발 물레를 고집하고 달 항아리는 상하부를 이어 붙여 조상들 고유의 제작방법을 고수한다. 서산백토와 하동백토를 사용하며 도석, 대리석, 석회석 등을 혼합하여 유약을 만든다. 그의 도자기들은 고풍스러워 우리의 옛 작품들과 많이도 닮아 있다. 서민적이고 낭만적이며, 그의 당당한 풍채만큼이나 남성적이기도 하다. 고상하고 우아하다. 화려한 듯 절제된 작품의 선과 어머니 젖가슴에서 갖짜낸 유백색(乳白色)을 띈 도자기는, 마치 500년 된 조선 소나무를 앞에 놓은양, 깊은 권위가 느껴진다. 그의 백자 달 항아리와 마주하면 국립 민속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의 국보 달 항아리와 혼돈을 일으킨다. 진사를 사용한 백자동자 주전자병은 그 선과 유약의 색상이 고풍스럽고 단아하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에 넊을 잃는다. 신비한 깊이를 자랑하는 청자대나무 매병을 보노라면 서명장의 작품이 결코 고려시대 도공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고려청자를 뛰어 넘는다라는 확신이 밀려온다. 분청고형 항아리 앞에서면 누런 호박색 분위기를 풍기는 색상의 유약을 보노라면 한 덩어리의 황금덩어리가 내 앞에 있는 양 가슴이 떨려온다. 그는 도예고를 나와 군산대 도예과 2학년인 조카 (서강역) 자랑을 할때 면 눈에 생기가 돈다. 얼마 전 KBS아침마당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전국의 도예가들이 겨루는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예,성형분야‘에서 학생신분임에도 3위에 입상하였다‘고 자랑을 한다. 조카는 현재 서명장의 기능 이수자 3명중 하나이다.(5년의 수련과정을 거쳐 1명이 전수자로 지정된다.)“내 작품은 불의 혼과 나의 혼의 합작품”-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인격체인 나와 인격체를 가진 불의 합작품이다. 나는 물레와 성형을 하고 그림을 그려 넣어 가마에 넣으면 그때부터는 불이 자신만의 솜씨로 작품을 빚는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할 뿐이다. 불이 허락하는 작품은 10-20%이내이다. 사람들은 나의 혼과 불의 혼의 합작품을 좋아 하는 것 같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도자기를 좋아한다. 일본, 중국의 도자기와 우리 도자기의 차이점은?-“6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자연미를 지닌 우리작품들에 눈이 떴었다. 그때 지순택 선생 가마로 막사발, 청자, 백자 등이 매달 수 천 개씩 일본으로 수출됐다. 성형실장으로 일하면서 매일 밤샘작업을 했다. 중국의 화려함이나 일본의 깔끔, 정교함 보다 우리 고유의 우직함, 거친 맛, 중후한 자연미에 매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들도 우리 전통도자기들을 흉내 냈지만 우리처럼 불의 혼으로 모양과 색깔이 나오는 도예기법은 흉내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도예인으로 존경받는다.2007년 9월에는 일본NHK방송국 특집으로 ‘한국 도자기의 명장’ 촬영을 재일동포 탤런트 유민씨가 한도요로 날아와 도자기제작 전 과정을 촬영해 일본전역으로 방영하기도 하였다.후쿠오카 미술관, 다이마루 백화점, 교또 킨텐츠 백화점 초대전등 수많은 일본 초대전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팬들이 형성되어있다. 심지어 일본 아사이 제과(주) 대표를 축으로‘한도 서광수를 사랑하는 일본 모임’도 있다.
    • 초대석
    2011-11-01
  • 이천새마을금고 향후4년 책임질 새임원 선출
    (속보)이천새마을금고(이사장 이상필)가 지난 29일 양정여고체육관에서 제13회임시총회를 열고 조합원 1300여명이 집결한 가운데 투표를 통해 향후 4년간 이천새마을금고를 이끌어나갈 새임원진을 선출했다. 이날 투표에서 이사장직은 현 이상필이사장이 단독출마로 연임된 가운데 부이사장 1명 이사7명이 새로 선출되었다. 제2기를 맡는 이상필이사장은 당선 소감에서 그동안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해 온 결과인 것 같아 직원들을 비롯한 모든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앞으로의 4년도 새로 선출된 임원진과 함께 열심히 이끌어 나가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 초대석
    2011-10-31
  • 이천새마을금고 향후4년 책임질 새임원 선출
    (속보)이천새마을금고(이사장 이상필)가 지난 29일 양정여고체육관에서 제13회임시총회를 열고 조합원 1300여명이 집결한 가운데 투표를 통해 향후 4년간 이천새마을금고를 이끌어나갈 새임원진을 선출했다. 이날 투표에서 이사장직은 현 이상필이사장이 단독출마로 연임된 가운데 부이사장 1명 이사7명이 새로 선출되었다. 제2기를 맡는 이상필이사장은 당선 소감에서 그동안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해 온 결과인 것 같아 직원들을 비롯한 모든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앞으로의 4년도 새로 선출된 임원진과 함께 열심히 이끌어 나가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 초대석
    2011-10-31
  • 李朝白磁 달항아리의 最高峰, 志堂 朴富元
    李朝白磁 달항아리의 最高峰, 志堂 朴富元 現存하는 달항아리의 最高 至尊 미국 최대 SMITHONIAN 박물관 지당 달항아리 소장 광주 王室도자기 初代 名匠,“아주 일그러 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도 아닌 이 어리숙 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 우리 조상들의 솜씨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 중 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을 예로 들라면 달 항아리를 예로 들고 싶다.전 세계 몇 점 밖에 남아있지 않아 아쉽고, 제조 기술이 대가 끊겨 더욱 아쉽다.필자는 도자기 축제를 맞이하여 광주, 이천, 여주 도자기 전시장을 돌아보며 달 항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 우리지역에서 달 항아리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지당 선생님이 계신 陶元窯(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347-2)로 발길을 향했다.달 항아리에 관한 일화는 많다 그러나 해외에 유출된 달 항아리 중 아래의 2 건의 일화는 세계인들이 우리의 달 항아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를 말해주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동시 귀하디 귀한 조상들이 남겨준 달 항아리들을 우리 품으로 되돌릴 길 없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영국에 가 있는 달 항아리에 관한 逸話“내 생애 가장 큰 보람은 조선백자 달 항아리를 박물관에 유치한 것”대영제국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한 말이다.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스튜디오 도예가의 대부로 불림)가 1935년 일본인과 함께 조선을 방문 시 서울의 고 미술상에게서 구입해 영국으로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좋아했다는 말이 전해진다.그는 달 항아리를 동료작가 루시 리에(1902-1995)에게 선물하였다. 루시 리에가 사망하면서 그의 부인에게 넘어갔고 그 부인은 대영 박물관에 작품을 매각하게 된다. 일본에 가있는 달 항아리 逸話도주하던 도둑, 포위되자 달 항아리를 던져 산산조각나...일본 오사카 동양도자 박물관에 소장된 달 항아리는 원래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소장되었었으나 1995년 7월4일 대낮 관음원(도다이지사찰 내의 17개의사원중 하나) 객실에 도둑이 들어 훔쳐가다가 신도우 신카이 주지 스님과 경비원에게 발각되자 집어던져 350여 조각으로 완전히 가루가 되다시피 한 것을 가루까지 쓸어 담은 상태로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무려 2년에 걸친 검토 끝에 너무도 귀한 작품이라 형태만이라도 남기자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4년간에 걸쳐 기적적으로 복원하여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복원을 담당했던 기술자가 “복원방법에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깨졌던 흔적조차 모르게 감쪽같이 복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세히 보면 복원한 것을 알 수 있도록 복원하는 방법입니다.” 두 가지 방법 중 後者의 방법으로 復原되었다. 李朝 白磁 달 항아리는 70년대 고 서울 중앙 박물관장 최순호가 조선백자를 바라보다가 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달 항아리라고 명명했는데 실제로 도자기들을 구경하다가 돌아갈 때 머릿속에 달처럼 떠오르는 도자기가 달 항아리이다. 17세기에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었다 당시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는 우리 조상들이 오랑캐로 여기던 북쪽의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다. 명나라는 우리사대부들에게 儒學을 전해준 정신적인 종주국이었는데,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의 승리로 중국이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나라로 바뀌자 (당시 중국은 청화백자에 에나멜로 5彩,7彩등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일본도 이를 배워 똑같이 만들어 유럽에 수출했다.) 의리와 절개를 숭상하던 우리 사대부들은 오랑캐들의 문화를 배격하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시 청나라에서 안료를 수입해야하는 청화백자 제작을 중단하고, 조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철화백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달 항아리도 이러한 맥을 이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광주군 官窯(사옹원 분원으로 380여 도공들이 있었고 28개 직급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음)인 남종면 金沙里 가마(현대어로 ‘국영 왕실 도자기 공장’)에서 만들어졌던 달 항아리는 다양한 양념...간장,소금,쌀 등을 담아 부엌,광 등에 놓고 쥐나 벌레들로부터 보호하고 습기를 막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대가 끊긴 달 항아리가 그리워, 달 항아리의 대가를 찾다가, 이조시대 관요가 위치한 경기광주 “왕실도자기 초대 명장”인 지당 박부원 선생님에 대한 명성을 접하게 되었다. 1962년, 20대 초반, 인사동을 거닐다가 우연히 상점에 놓인 분청사기의 굽(지순택 作)을 보고 반한 그는 당시 한국도자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려도요 도암 지순택님(고려 청자,이조백자의 대가) 을 찾아가 12 년 간 사사, 도예의 길을 걷게 된다.지순태과 함께 땔감이 풍부한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두메산골에서 2년간 청자와 백자를 재현하다가, 75년 왕실도자기의 고향인 경기광주에 정착한다. 전통도자기 재현을 위해 그는 50년간(내년이 50주년)피나는 실험과 경험을 통해 감각으로 경지에 오르게 된다. 계절, 기후, 시간, 태토, 유약 마다 달라지는 까다로운 도자기의 특성상 그의 파란만장한 고생담은 책으로 엮기에도 부족하기에 이정도로 접는다.현재 그는 달 항아리에 진주, 양구 고령토를 사용하고 도석, 느릅나무재를 사용한다. 그의 백자대형 달 항아리(국내 최대)는 ‘하나의 항아리에서 10개의 항아리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젖빛같이 희고 부드러운 살결 은은한 질감, 소탈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서려있는 그의 작품은 보는 각도, 위치에 따라 다른 느낌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달 항아리에 대하여 정의 한다면?-“조선 백자의 미는 理論을 초월한 白衣의 美,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고 느껴서 모르면 아예말을 마오“라고 달항아리를 노래한 삼불 김원용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훌룡한 도자기란?-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감으로 좋은 것을 알고, 아는 사람은 ‘미에 대한 주관적 상식’이 가미되었을 뿐, 다시 말하면 초보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첫눈에 반하는 것이고, 아는 이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할 뿐이다. 둘 중에서 감으로 판단하는 아름다움이 더 정확하다.*최근 연구하시는 분야는?-어린 시절 고향 갯벌에서 망둥이, 게를 잡던 갯벌이 어머니의 가슴속과 같다고 생각한다.갯벌이 지닌 색을 도자기에서 재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갯벌색은 하늘이 주는 최고의 아름다움이고 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픈 향수이다. 그 아름다움과 향수를 내 작품에 담아내고 싶다. 단국대 도예학과 박종훈 교수는 “지당의 작품 주제는 ‘일상에서의 만남이다. 그래서 즐겁고 포근하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활화산과도 같다. 전통을 재해석 한다. 전통을 자연적, 인간적으로 재해석하여 표현 하므로 後學 들의 指標가 된다.” 전통도자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닌 도자기평론가 정병조씨는 “현존하는 도예인 중에 최고의 도자 달인 두 분을 꼽으라면 이도 다완 과 이조 백자로 유명한 白山김정옥 선생과 분청사기와 달 항아리의 대가인 志堂 박부원 선생이 생각난다. 박부원 선생의 달 항아리는 투박한 조선 달 항아리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 광주에 온 시기 ; 67년 75년?달항아리 소지,태토? 유약?62년 몇 살? 도예입문 50년?달항아리 소장처?처음부터 확 눈을 잡아끄는 매력은 고려청자에 못 미친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잊을라치면 더욱 떠오르는 첫사랑 소녀처럼 달 항아리는 은은히 다가온다. 실제로 거실에 달 항아리 하나를 놓고 보고 있으면 그 어떤 인테리어도 그 위상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민족의 겸손과 부족함을 동시에 말해주는 불의 조화로 생긴 좌우 대칭의 불균형은 우리 민족의 겸손과 부족함을 말해주는 듯하고, 굵고 풍만한 허리 라인은 마치 흰 한복을 입고 물 항아리를 머리에 얹은 조선 여인의 풍만한 엉덩이가 떠오른다. 당시 청 문화의 영향으로 화려한 총천연색의 중국 그릇이 인기를 끌었으나 우리 조상들은 화려한 치장을 배격하고 , 자신들의 순수성, 절개와 의리를 달 항아리를 통해 드러냈다. 상, 하부를 이어붙인 자국을 당당히 드러냄으로 자신감과, 분수대로 살겠다는 조상들의 정직한 인생관이 투영되어 있다.
    • 초대석
    20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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