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前호에 이어>
 
사홍은 종친 서원군의 손자사위인 현석규를 탄핵하다 성종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며 복수의 칼을 겨누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였다.
풍천임씨.JPG
3<임원준 묘역>
임사홍은 이러한 기회를 잡은 것은 자신이 부친의 못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엄청난 치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곳묘역에서 가장 눈에 뛰는 것이 호석이다. 원나라 복장을 한 호석은 우람하기 그지없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당시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하고 우리나라는 신하국(臣下國)이라 하는 사대사상이 팽배하든 시절에 자신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우월한 가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집안은 대대로 중국어에 능통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로 인하여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욕심을 자재하지 못하여 화를 불러들이는 행위들을 펼쳐나간 것이었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했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임원준 묘의 기단 아래로 흙이 빠져나가 구멍이 생기니 석회를 버무려 땜질했지만 이 역시 부식되고 무덤(구멍)안으로 짐승들이 더나든 흔적이 보인다.
채홍사를 하며 권력을 마음껏 휘둘러보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갑자사화 2년 후 중종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역신이 되어 처형당하고 자신의 아비까지도 부관참시를 당하게 하였으니 불효막급이라. 하지만 이모든 것은 이 자리 땅의 기운이 작용했다 보아야 할 것이다.
4<임사홍의 묘>
임사홍의 묘자리가 혈(穴)이라하는 지사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지각에 해당하는 허화일 뿐이다. 혈(穴)자리를 볼라치면 임견(任肩)선생의 묘 뒤쪽 15m지점쯤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보일 것이다.
왕조실록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한 역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산소는 벌초하여주는 후손하나도 없이 방치되는 모양을 보며, 아무리 인과응보라 하지만 풍수의 무서움에 몸을 사린다.   
 
*본내용은 풍수적 소견이오니 풍천임문에서는 널리 해량하여 주시기를 앙망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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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능현동 풍천임씨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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