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前)호에 이어
명성황후가 어떠한 곳의 풍수적 기운을 받아 그 지위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원인을 찾아보려 민씨(閔氏) 가문의 선대 산소를 대부분 둘러보았지만 이 자리구나 하는 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여주시 능현동에 자리한 황후의 7대조 민유중의 묘는 그리 좋은 혈(穴)자리라 하기 어렵다. 또한 가남읍 안금리 선영에는 6대조 민진후의 묘부터 부친인 민치록의 묘까지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 6대조의 묏자리가 좋기는 하지만 발음을 입기는 너무 멀다는 느낌이고 5대조 민익수의 묘도 아주 작은 자리일 뿐이며, 그 이외는 눈에 뛰는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태어난 능현동의 생가자리에 서보면 도시화 되는 과정에 많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아미사(蛾眉砂) 안산(案山)이 예쁘게 받쳐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풍수고전에는 아미사 안산은 왕비를 낳는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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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치록 대감의 묘>
민치록의 묘는 1858년 사망당시 지금의 자리인 여주 금교리(지금의 가남읍 안금리)에 묘를 조성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일이 많이 발생하자 부모의 묘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에 강원도 원주로 이장을 하였다가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으며 또다시 광주 쌍령리로 옮겼다가 1894년 3월 20일 충남 보령에다 천장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민씨 문중에서는 2003년 다시 여주 선영의 원래자리로 천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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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 주포면에 있을 때의 민치록 묘>
명성황후는 자녀 4남 1녀를 낳았지만,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자신의 형제도 1남 4녀나 되었지만 자기하나밖에 성장하지 못하였고 자신도 5남매의 자식을 낳았으나 계속 죽어나가니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이였을까 하는 짐작이 가는바 있기도 하다. 시조부인 남연군의 명당 덕에 왕권을 차지한 내용은 조선 팔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친정가문이나 자신을 위해서 풍수의 힘을 빌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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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금리 민진후 묘역>
하지만 명당을 얻는 것은 적덕함과 시절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이거늘, 인연을 만나지 못해 술사들의 세치 혀에 놀아난 꼴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나 최종천장지였던 충남 보령군 주포면 관산리는 상당히 눈여겨 볼만한 자리로서 예산 덕산의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와 형세적(形勢的)으로 많이도 닮은 곳이다. 하지만 천리행룡에 천하면당을 품었다 할지라도 재혈(哉穴)이 잘못되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사람의 몸에 있는 침(針)자리 같이 정말로 땅의 기운이 응집된 그 혈(穴) 자리를 집어내어야 하는데 속사들의 눈에 큰 명혈이 그리 쉽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남연군묘를 점혈(點穴)한 풍수사(風水師) 정만인 같은 이인은 벌써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속사(俗士)들은 모양세에 취하여 혈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명당의 당판만 깨트리는 일을 했으니 발복(發福)은 고사하고 횡액(橫厄)만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보령땅으로 민치록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에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니 천하에 패절지가 되고 말았으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는 땅이 되었다.
민씨 문중에서는 명성황후가 떠나 간지 108년만인 지난 2003년 여섯 번쩨로 민치록의 묘를 충남 보령에서 여주시 가남면 안금리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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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민치록의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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